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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ul 12. 2023

쿠로다 카츠히로의 배상 문제

2021-01-02 19:20:24

일본의 쿠로다 카츠히로가 한일 배상에 대해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 

“일본이 패전 후에 조선에 많은 것을 남기고 간 것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인 것이다. 

쿠로다 카츠히로가 일본의 극우 인사이므로,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전쟁이란 현상 자체가 배상을 담보로 해서 일어 나는 활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 박근혜 정부 때도 배상금이 지급이 되고, 이 외에도 친일파 재산이라던가, 전범 기업 등등으로 어떤 과정과 금액을 책정해서 배상하느냐를 놓고 아직도 소모를 많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쿠로다의 주장은, 이러한 관념의 울타리 안에서 나온, 다른 계산식일 뿐이다. 


쿠로다 카츠히로는, “SK 그룹은 센 요코 직물이란 회사를 뿌리로 둔다.”고 했는데, 어디 SK 뿐이겠는가. 

지금은 철거됐지만, 조선 총독부도 우리가 박물관으로 썼고, 한국은행과 명동의 신세계 백화점 건물도 일제 시대에 일본이 주도해서 건축된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건물 뿐이 아니라, 이 외에도 찾아 보면 아주 많을 것이다. 

일제 시대 일본에게 전수받은 선진 기술, 학문, 철도, 우리 나라는 그 위에 일어 선 것은 틀림 없다. 

SK가 정말로 일본 기업을 뿌리로 둔 것인 지 아닌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록, 일본에게 수탈도 많이 당했지만, 일제 침략을 통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국제 사회에 눈을 뜨게 된 장점도 있었다. 

역사를 냉철히 바라 봐야 한다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입장, 피해를 당했다는 것만 보려고 하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해 개화가 된 것은 바라 보지 못 한다.

오늘 날 우리 나라가 급성장하는 기본 토대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제 아무리 고층 빌딩도 1 층 없이는 쌓아 올리진 못 하니까 말이다.


만일, 아직도 배상의 논리에 우리가 입각해야 한다면, 셈법은 매우 복잡해 진다. 

과연 얼마나 많은 세월과 노동력을 소모해야 양국이 완벽하게 합의하고 이행하는 과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서로를 여전히 가해국과 피해국으로 인식하면서 적대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는 답이 나올 수가 없다. 

악감정만 더욱 깊어 지면서 냉전으로 양국이 힘만 소모할 뿐이다. 

배상과 합의는 커녕, 서로의 셈식만 주장하는 단계에서 그칠 것이다. 

배상의 논리로 따진다면, 일본에게 수탈을 당한 금전적 가치와 징용으로 인한 피해, 위안부 문제, 창씨 개명에 대한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배상액으로 환산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카츠히로의 주장 대로 조선에게 긍정적인 영향도 미쳤는데, 이는 어떤 산식으로 공제할 것인가. 

또, 이는 배상 안에서 공제가 이뤄 져야 하는가, 배상과 별도로 일본에게 얻은 장점에 대해서 금전적으로 우리가 보답해야 할 일인가. 


한 세기가 지나 가 버린 상황에서 어찌 당시의 상황을 엄밀히 검증할 것인가. 

이미 세대가 바뀌었고, 당시의 생존자들은 극 소수이거나, 양 국의 산 증인들이 다 고령이 되어 버려서 신용할 것이 못 된다. 

배상의 논리를 따진다면, 산 넘어 산이 끝이 없다. 

이 것은 아니다. 

전쟁 문제에 대해 배상의 논리로 접근하는 것부터 잘못이고, 설령 배상에 대해 양국 다 합의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현실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으며, 배상보다 그 검증과 합의 과정에서의 양국의 자금과 노동력이 더욱 클 것이다. 

배상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인데, 이를 말미암아 우리 국력을 키우는 데에 경각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으로 돈을 타 낸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민족에 대해 나약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피해자라는 것은, 나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퇴치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배상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 것을 계기로 일본을 더욱 얕잡아 보았을 것이다. 

무능하고 나약한 자들이나 피해자라고 배상을 요구한다. 

스스로가 힘이 있다면, 애초에 당하지를 않는다. 

헌데, 배상을 요구할 것이 뭐 있겠나. 


우리는 보다 본질적으로 쿠로다 카츠히로의 활동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는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인사로, 우리가 반일에 대한 목소리를 높일 수록, 그가 발언하는 수위와 강도 또한 같이 높아 진다. 

자국에 대한 보호인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일까. 

국내에 존재하는 반일 활동으로부터이다. 

쿠로다는 과거에 가장 강경했던 발언 중에 하나가, “한국의 위안부 여성은 가난 때문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였다. 

나는 그 것이 사실인 지, 아닌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마, 전체 위안부 여성 중에 일부 그런 여성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 한다. 

하지만,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카츠히로는 어떻게 한국의 공격에 대해 변호하고, 반격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그의 주장대로 사실이라면 더욱 그럴 테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표면적인 면만 보고 쿠로다를 비난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는 우리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응수할 뿐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본을 적대하기만 할 뿐, 우리는 한일이 화합하기를 바란다고 정부에서 발표하지만, 그 것은 일본에게 선행적인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국민과 정부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과오에 대해 직시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표면적인 일본만 미워하고 있다. 

쿠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이다. 

쿠로다는 우리의 일본에 대한 태도 중에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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