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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ul 12. 2023

음악의 도인의 경지에 이른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 (2021-03-18 23:06:19)

한 동안 음악 여정을 떠났다.

내가 피상적으로 알던 음악을 심층적으로 다시 접근하는 것도 있고, 기존 음악 영역이 식상해서, 새로운 음악을 찾아 다녔다.

요즘은 간단한게 검색만으로도 얼마든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 음악을 접하기는 참 좋은 세상이다.

좋은 음악, 좋은 음악인을 찾던 중, 이런 발상을 해 봤다.

경매에 비싸게 낙찰된 음반이 있을 테고, 그 것이 시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던, 정말 음악적 가치가 있던, 직접 들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검색 중에 접하게 된 것이 요한나 마르치라는 동 유럽 출신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바이닐이었다.

활동 년도도 5~60 년대에 소수의 레코드만 남겼고, 이미 한참 전에 작고한 연주자였다.

왜 비싼고 하니, 당대에 꽤 유명을 날리던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당시 시대적으로 레코드 기술이 발달치 않았고, 레코드 관계자와 사적인 일로 인해 녹음 활동을 중단하는 바람에, 소수의 바이닐의 희소 가치가 껑충 뛰게 던 것이다.


"'요한나 마르치? 처음 들어 보는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얼마나 잘 치는 지 들어나 보자!"


바흐의 바이올린 곡은 율리아 피셔, 이사벨 파우스트를 통해 이미 들어 본 적이 있던 터라, 가늠이 쉬웠다.

그 것은, 클래식 기타를 배울 적에 샤콘느라는 대곡을 접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르치가 연주한 바흐 곡을 한 번 들어 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파격적이란 느낌보다는, 확실히 결이 다르긴 다르다는 것이 첫 인상이었다.

불과 몇 곡을 더 들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마르치는 아예 탈 레벨 급이었다는 것을.


내가 바이올린은 잘 모르지만, 난다 긴다는 활잽이들 연주를 들어 봐서 조금은 안다.

야니네 얀센, 아까 위에 언급한 파우스트와 피셔, 힐러리 한, 이자크 펄만, 정경화까지.

난다 뜬다는 쟁이들은 참 많다.

가장 파격을 느낀 연주자는 정경화였고, 정경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반면, 테크닉이 뛰어 나기로 정평난 얀센은 좋게 들어 보려고 해도 참 실망적이었다.

연주 자체는 좋지만, 기교 자랑을 하려고 한 것인 지, 정작 작품은 도외 시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결국, 그들 모두 뛰어난 '쟁이'는 될 수 있을 지언정, 진정한 '음악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 했다는 것을 마르치의 연주를 듣고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려는 사심을 완전히 비운, 참 겸허하면서도 순수한 연주.

내 자신을 투명하게 비우면서 순전히 작품을 표현하는 것이 그 녀의 연주였던 것이다.

즉, 기존의 다른 연주자들은 작품을 통해 연주를 하지만, 그 녀는 거꾸로였다.

연주를 통해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음악이란 수단을 통해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닌, 연주 행위를 통한 음악의 표현, 이 둘은 아주 다르다.

음악의 본질, '소리를 듣고 즐긴다.'는 그 본질을 정확하게 체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소리, 아니, 이런 음악을 낼 수가 없다.

언뜻 듣기에 기교가 뛰어 나게 화려한 것도 아니고, 능수능란하게 빠른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연주에 이렇게 충격을 받고 압도를 당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워낙 오래 전 레코딩이라, 음질은 CD보다도 형편없다.

그럼에도, 너무 좋은 감정을 넘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감히 내가 평을 한다고 덤빈 것 자체가 건방질 정도로, 아예 급 자체가 달랐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니,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하는 것이 탐탁치 않을 정도로, 그는 진정한 음악인에 반열에 오른 자였다.


이 시대에 장르와 악기를 넘어, 훌륭한 연주자와 프로 뮤지션들은 참 많다.

하지만, 정말 순수하게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스스로 자체가 악기와 혼연일체되어 음악을 표현한 이들이 누구였는 지, 내가 들어 본 모든 음악의 뮤지션들을 재평가하자니, 참으로 먹먹해 진다.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면, 번개같이 빠른 속주로 록 기타 계에 충격을 준 잉베이 맘스틴.

초창기에는 음악성과 연주력을 겸비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나 역시도 초창기 레닌그라드 실황까지는 호평할 수는 있다.

브라질 라이브까지도 레닌그라드 못지 않게 좋다.

그러나, 갈 수록 연주력만 남고, 정작 음악성이 빠지자, 그에 비례하게 인기 또한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대중들의 감상이란 정확한 것이다.


지금의 잉베이 맘스틴의 모습은, 그저 왕년에 잘 나갔던 거장이란 딱지로 연금이나 타면서 지내는 모습 밖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음악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수단으로 삼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는 좋은 연주자가 될 수는 있어도, 참된 음악 가치를 추구하는 음악인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잉베이 맘스틴만 거론해서 악평을 하자니 조금은 미안하지만, 거의 모든 뮤지션들이 이 정도 실정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출세하고 부와 인기를 거머쥐니, 거기에 취해 좋은 음악을 만들 수가 없다.

영감 자체가 떠 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에 일궈 놓은 토대가 있으니까, 노년에 그 걸 반석으로 해서 그냥 연명하는 실태는, 거의 모든 대중 음악 활동을 하는 프로들의 공통된 현실이다.


이 시대에 음악인이 있을까?

이는, 음악이란 길을 통한 길, '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대해 묻는 것이다.

내가 아직 만나지 못 한 것인 지, 내가 보고도 지나친 것인 지를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아직 보질 못 했다.

쟁이들은 수두룩할 지언정, 정말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의 정도를 추구하는 음악인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번 음악 여정에서 만나게 된 요한나 마르치는, 가히 영광이랄 수 있다.

악전이나 이론에 빠삭하고, 연주 기교에 능한 것으로 음악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녀처럼 음악을 알고, 정말 자신을 비워서 초연하게 음악과 하나가 되는 음악인, 앞으로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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