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7 10:03:14
요새 철학 강의를 듣고 있다.
듣다 보면, 과거 대 철학자라고 우러러 보던 이들을 다시 보게 된다.
공손룡은 그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극단주의자였다.
'백마비마',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유명해서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단, 그 참 의미에 대해 이해하지 못 하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었 갔었는데, 이 번에 제대로 곱씹어 보게 되었다.
백마는 말이 아니면 뭐냐는 반문에, 오로지 흰 말만이 백마이다, 라고 답변.
'말'이란 단어 자체는 말의 색상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
나에게 백마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한다.
여러 색상을 가진 말의 한 '종류'이니까.
백마는, 말이란 '과'의 흰 색상을 가진 한 필의 말이다, 뭐가 어려운가.
공손룡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물에 대해 함부로 단정짓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물론, 철학을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덕목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물을 인식하고 규정하는 데 있어, 여러 가능성을 닫아 놓고 극단으로 치닫는 오류가 있다.
흰 돌과, 딱딱한 돌은 다르다는 논리가 그 것이다.
흰 돌은 시각으로 느껴 지는 관점이고, 딱딱한 돌은 촉각으로 느껴 지는 관점이기 때문에, 둘은 다르다는 것.
틀린 얘기는 아니다.
눈을 감고 만져 봤을 때는 그 돌이 흰 돌인 줄 모른다.
또, 돌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만져 보기 전에는 그 돌이 딱딱한 지 어쩐 지 모른다.
헌데, 누가 그렇게 돌을 체험하는 지.
4 살 배기 아이한테도 돌을 쥐어 보면, 그 돌이 흰 지, 검은 지, 딱딱한 지, 어떤 지 바로 안다.
시각장애가 아니고서야, 그냥 돌을 만져 보면 안다.
희고 딱딱한 돌, 왜 이 게 성립되지 않는가.
그리고, 세상에 딱딱한 돌이 어디 있다고.
요새는 만져 보기도 전에 스마트폰만 봐도 해안가에 흰 돌은 넘쳐 난다.
공손룡한테 흰 돌 사진을 보여 주면, 절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 직접 본 게 아니고, 직접 만져 보지 않았으므로.
재미있는 얘기 더 하자면.
만일에, 공손룡한테 정말 흰 말을 보여 줘도, 공손룡은 아니라고 할 양반이다.
왜?
백마라도 완전 백마는 아니고, 약간 부분적으로 희끄무리하게 회 색 빛이 도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을 보여 주면, 공손룡은 부분적으로 희끄무리한 재 색이 섞였기 때문에 완전한 백 색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백마가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럼, 아예 백마를 완벽하게 흰 페인트에 담가서 보여 주면 맞다고 할까?
당신 논리대로 완전 하얗지 않느냐?
이 번에는 "하얀 칠을 한 말이지, 자연 그대로 흰 말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손룡의 논리대로 라면, 이 세상의 흰 말은 아예 한 필도 없다.
정말 자연 그대로 완전 흰 말을 보여 줘도, 공손룡은 말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 보고, 조그마한 검을 털 몇 개가 섞였다는 이유 만으로 백마로 인정받지 못 한다.
극단의 논리로 펼쳐 나가면 이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 가면서 공손룡 식 논리 대로 사물을 인식하고 살아 가는 이들이 누가 있을까?
흰 차를 가리켜, 저 것은 차냐고 물으면, 다 그렇다고 한다.
공손룡한테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지 적으로 모자란 인간이거나, 제 정신이 아니라고 치부해 버린다.
사물을 인식하기 전에 선입견으로 단정하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덕목임은 틀림없다.
그런 관점에서 공손룡의 신중함은 분명 긍정적으로 쳐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오로지 그 것 만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단으로 치달리게 된다.
유연하면서도 개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선입견도, 극단적인 엄격함이 아닌 균형점을 찾는 것이 공자가 말한, '중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