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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Sep 12. 2023

수행

뿌연 유리창이 보기 좋지 않다.

그래서 열심히 닦았다.

다 닦고 나니, 바깥 풍광이 너무 아름답더라.


유리창 밖으로 비친 사람들의 모습.

저렇게 근사하고 멋진 사람들일 수가.


이 번엔 거울을 닦았다.

거울에 비친 흉하고 추한 나의 모습.

저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웬 이런 모습인가.


나는 더 이상 거울을 닦지도, 유리창을 닦지도 않았다.

오로지, 나의 더러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계속 되는 목욕, 묵은 때들.

씻어도 나오고, 또 씻으면 또 닦여 나오는 나의 구정물들.

살을 아리는 쓰라린 아픔과 부끄럽고 초라한 나의 모습. 


얼마나 닦아 냈을까, 쉼없이 닦아 온 나의 몸둥아리.

닦아 내다 지쳐, 잠깐 돌바위에 앉아 쉬어 보는데.

불현듯 개울가 달빛에 비친 나의 모습.


내가 이렇게 미인이었다니.

나도 저 사람들 못지 않게 멋진 사람이었다니.

세상을 바라 보면 온 우주가 나에게 현현히 들어 오고.

만인의 모습을 바라 보니, 온통 선남선녀들 뿐이로구나.

거울 속 나의 모습도 저들처럼 아름다우리니.


힘을 내어 나머지 때를 씻어 냈다.

더 이상, 닦아 낼 거울도 없고, 유리창도 없었다.

마지막엔 닦아 낼 나 조차도 없었다.

눈을 감았다 떠 보니, 세상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게 부둥켜 안고 있네.

나도 그들 품 안에 있고.

아니, 그냥 모든 것이 하나됨 뿐이었다.


나도 없이, 너도 없이, 이 세상도 없이.

닦는 나도, 닦을 유리창도, 닦을 거울도, 아무 것도 없이.

고로, 수행도 없었다.

애초부터 '나'란 것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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