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이라 유독 이런 광경이 눈에 들어 온다.
오늘은 더우기 비가 오고 습한 날씨라, 개구리나 지렁이, 두꺼비, 온갖 날벌레며, 짐승들이 날뛰기 딱 좋다.
하도 집 안에 있는 게 갑갑해서 바깥 좀 걷다 돌오 오는 길목에, 웬 황토색 개구리가 차에 깔려 죽어 있지 뭔가.
멍한 눈을 뜬 채, 속이 터져 죽은 가여운 개구리 한 마리.
익숙한 풍경일 법도 한데, 불쌍한 심정이 들지 않을 리 있겠는가.
어쩔 때는 중뱀 한 마리가 깔려 죽은 적도 있다.
뱀은 제법 날렵한 데도 말이다.
이보다 차가 빨리 달리는 국도변에는 그 날쌔다는 청설모의 사체도 종종 발견된다.
멋드러진 꼬리의 귀여운 청설모.
안타까운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렇게 멋진 꼬리의 청설모가 죽으니, 아깝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보며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이 현상을 어떤 윤리랄까,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동물이 희생당하는, 이런 생각은 안 했으면 한다.
차가 없었으면, 이렇게 동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할 리 없을 것이고, 이렇게 비참한 광경을 막지 않겠느냐고.
차는 현대 문명의 필수 교통수단인데, 그럼 뭘 타고 다녀야 할까.
동물을 보호하는 생각은 참 지당하다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문명의 이로움 마저 내려 놔야 할까?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도에는 '자이나교'라는 오랜 종교가 있다.
자이나교의 수도승들은 작은 미물도 귀중한 생명이라며, 붓처럼 생긴 커다란 털채로 바닥을 쓸면서 다닌다고 한다.
무심히 걷는 와중에 작은 벌레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란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참 거룩해 보이기도 하고,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현대 문명을 멀리하며 산다.
그들이 그 나라에, 그 지역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살생은 죄라며, 살생을 범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살생 안 하며 살다 죽기' 프로젝트를 성공하기 위해 살아 간다.
애초에 태어 나지도 않았다면, 다른 살생을 지을 일도, 고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쌀도 생명이고, 풀도 생명인데,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 걸 깨달았다면, 그냥 바로 아사하는 게 위대한 종교적 실천이 아닐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더욱 와 닿게 된다.
그토록 이 땅 위에 가장 으뜸으로 존귀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스런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 생명을 영위한다.
그래서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먹이사슬 최상위에 존재한다.
우리가 식사로 섭취하는 것 중에 생명 아닌 것이 무엇이던가.
이 것을 살생을 한다, 환경을 파괴한다,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디딜 땅 자체가 없게 된다.
쌀을 수확하기 위해 낫으로 베어 질 때, 쌀은 아프다고 울지 않는다.
그러나, 닭이나 소를 잡을 때 울며 절규한다.
개체로 따지자면, 소 한 마리 잡는 것보다 어마어마한 쌀이 희생되는 것이다.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마트에서 고기로 사서 구워 먹을 때는 모르는데, 방송이나 도축되는 모습을 볼 때.
다시 주제로 돌아 오자면.
길가에 차에 의해 죽는 동물들을 본다면, 그냥 한 번 이런 생명과 인간과의 관계를 환기하며 또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동물들이 사람 말을 알아 들을 리도 없고, 어쩔 때는 차를 피할 수 있어도, 어쩔 때는 피하지 못 한다.
개구리가 오늘은 어찌어찌 피하며 지나 갔어도, 내일은 장담 못 한다.
그 개구리가 살아 남는다면, 다른 곤충을 잡아 먹을 테고, 차라리 죽었다면 그 개구리에 먹힐 곤충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인간이 그 곤충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차를 타면서 그 개구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지 않나.
또, 그 개구리는 산다 해도, 먹이사슬에 의해 다른 뱀이나 동물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주 운좋게 다른 짐승에 먹히지 않고 천수를 누린다 하더라도, 어차피 수명이 다 해 죽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고.
길에 치어서 죽든, 다른 짐승에 먹혀서 죽든, 어차피 자연의 역할을 하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들이 새끼를 많이 낳는 것이다.
성체가 되어 자연 속 역할을 할 때까지, 다른 짐승에 먹히거나, 여러 이유로 죽는 것을 감안하면, 생존률은 낮기에.
차를 타는 것이나, 인간이 풀과 고기를 먹으면서 살아 가는 것이나, 그저 지극히 단순한 자연의 섭리이다.
어차피 살게 놔 둬도 다른 짐승에 의해 먹히거나, 다른 이유로 해서 죽거나, 설령 다 산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에게 별 의미가 없는 존재로 지나쳐 버린다.
살이 있는 것들은 살아서 이 세상의 역할을 하는 것에 감사하고, 또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차에 죽는 동물도, 우리의 양식으로 식탁에 오르는 것들은 우리의 자양분이 돼서 또 힘을 내서 잘 살아 갈 수 있게 안배해 주셔서 감사하고.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이해했으면, 자연의 안배에 감사하고 또 그렇게 살아 가면 된다.
이 것을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자연 파괴, 동물 학대,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서 엉뚱한 목소리를 외친다면, 이 현상을 겉만 보고 답을 내린 것이 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고, 그 것을 감사하게 잘 유용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바쁘게 살다 보면 조금 더 악셀레이터를 밟을 수도 있고, 힘든 일 하다 보면, 술 한 잔에 고기 생각도 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바쁠 때는 부득이 동물이 죽는 것을 감수하면서 바쁘게 살고, 배고플 때는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으면 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잘 유용하고,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인가가 정말 중요하다.
많은 사람을 위해 보다 큰 일, 보다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다면, 뭘 먹든, 차에 동물이 조금 치이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 것을 희생된 동물들의 값어치와, 세상에 보다 가치로운 일을 생산해 낸 값어치를 저울로 환산해 본다면, 어마어마한 결실인 것이다.
담대해 져야 한다.
잔잔한 감정에 빠져서 안타까이만 본다면, 그만치 세상을 보는 눈이 협소해 져 버린다.
깔려 죽은 개구리 한 마리 속에 이런 어마어마한 자연의 섭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걸 볼 수 있다면, 나는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미안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동물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도 언젠가 몇 배의 값어치로 세상에 널리 환원하겠노라고 다짐하고 가면 된다.
고로,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