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속선의 삶

"고양아, 미안하다."

by 속선

나는 며칠 전, 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부디 머지 않은 시기에 숨이 멎길 기도했다.

고양이는 내가 기억하기로 2006년도 5월 무렵에 출생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고양이의 전 주인의 연락처는 모르지만, 그 주인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과 닉네임 등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굳이 기억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전 주인의 글을 봤더니, 전 주인의 고양이의 출생을 추측할 수 있는 글들을 사라져 버렸다.

뭐, 정확한 생일 따위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분양받을 당시에 이제 10개월의 중성화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처음 인연이 되었는데, 이제 고양이 나이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약 19살 남짓이 된다.

살면서 식구들한테 참 웃음도 주고, 순수한 모습에 모두가 사랑하였다.

오죽하면, 잘 때 고양이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까지 있었으니.

그러다가 내가 데려와시 키우게 되었는데, 좀 맞지 않는 부분들도 더러 있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이가 먹거리를 가리는 것, 자기 입맛에 안 맞는 사료나 간식 따위는 어지간해선 먹지 않는다.

나는 그럼 그 사료를 비울 때까지 간식이나 다음 사료를 주지 않는다.


나는 평소에 고양이가 뭘 줘도 쓱싹 비우면, 즉각 다음 사료나 간식을 쉬지 않고 채워준다.

예뻐서 키우는데, 뭣이 아깝겠는가.

헌데, 먹을 걸 가린다던 지, 투정을 부리는 습관은 확실히 잡아서 각인을 시키려고 했다.


"비우면 뭐든 즉각 준다. 허나, 준 사료를 끝까지 거부하면 다음 사료는 절대 없다."


그런데 잘 되는가 싶더니, 결국 잘 되지 않았다.

그럼 못마땅하게 나는 그 밥을 비우고 새로 채워준다.


두 번째는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한 12 살 무렵 쯤이 되었나, 아주 큰 소리로 우는 습관이 생겼다.

이유는 모르겠다.

애초에 중성화가 된 상태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발정에 관한 문제는 배제했다.

그 소리는 마치, 서럽다고 해야하나, 뭔가 불만이 가득하다고 해야하나, 인간으로서 아주 듣기 싫은 소리였다.

잘 때 한 번 그러면, 정말 스트레스가 컸다.


세 번째는 이사를 갈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짐칸에 넣고 가면 안 되기에, 이사짐 사장님한테 양해를 구해서 조수석에 태우고 가는데, 정말 한 시라도 쉼 없이 대차게 울어댄다.

달래도 소용없다.

나 혼자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괜히 옆에 운전하는 이사짐 사장님한테 무한하게 미안해 진다.

이사를 갈 때마다 이 녀석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글쎄, 어쩌면 머지 않은 시기에 이사를 가야할 지 모른다.

이사 생각만 하면, 이 녀석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가도 문제인 것이, 여태까지는 그래도 고양이에 대해 어찌저찌 관대한 주인을 만났다면, 다음부터 그런 주인을 또 만나란 법이 없다.

고양이를 이유로 애초에 계약 자체를 안 한다고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다.

이사를 갔다 쳐도, 다세대는 이따금 크게 울어대는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안절부절이다.

가도 걱정이다.

평소엔 아주 순하고 나를 잘 따르고, 평온한 녀석인데 말이다.


그런 내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이렇게 나이가 많은 고양이는 평소에 거의 움직이 없다.

내가 보기엔,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넘게 잠만 자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채이다.

이러려고 데려 온 것도, 이럴 줄도 몰랐지만.

아까는 고히 자는 고양이의 발에 손을 대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서 고양이를 데려왔고, 나 좋자고 키운 고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노동력을 대신하기 위해 가축을 부리는 것이나, 고기를 얻기위해 가축을 사육하는 것이나 방식만 다를 뿐이지, 그 것도 결국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을 위한 행위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괜히 얘를 데려와서 내 이기심에, 한정된 공간에 고양이를 고생만 시킨 것은 아닌 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 고양이도 너무 나이가 많고, 집에서 무기력하고 우울한 채로 있으니, 너무 내 마음이 안 좋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더러, 내 현실 상황하고도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아이가 이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나는 그렇게 기도를 올렸다.

글쎄, 나는 고양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우울하고 무기력하지 말고, 다시 거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길.


그러나 나는, 이 고양이가 얼마를 더 살더라도 내가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기도한다고 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럼 순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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