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자동차 뒷 유리창 오른 하단에 '내 탓이오' 스티커가 붙여진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때만 하도 자기성찰적이고, 양보의 미덕이라는 좋은 느낌은 있었으나, 그런데 구체적으로 뭐가 내 탓인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 화두가 점점 내 앞에 아른거리더니, 오늘은 급기야 글을 남기기로 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사람들과 서로 관계하면서 때로 대립과 갈등을 겪는다.
갈등과 불화는 당사자들끼리의 기운 소모와 문제겠지만, 이는 넓게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천주교가 당시에 이런 사회적 불화를 나름 불식시키는 차원에서 상호 갈등이 있을 때,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남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갈등을 피해 가라는 차원에서 널리 운동화한 듯 하다.
자유주의, 다원주의 차원에서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면, 우리는 획일화된 사회보다 풍족하고 다채로운 사회를 살아 가게 될 것이다.
문제는, 뭐가 구체적으로 '내 탓'이냐는 것이다.
내 탓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내가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야 옳다.
자명한 것이고, 이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헌데, 천주교가 됐든, 불교가 됐든,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탓'이 있는 지를 이해시켜 주는 곳을 찾을 수 없다.
"뭐가 내 탓인데?"
'내 탓이오.'는 정말 내 탓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싸우지 말고 좋게좋게 덮어 두고 지나 가라는 것이다.
뭐가 내 탓인 지에 대해 성찰하지도 않고, 성찰해서 발견하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구체적으로 내 탓인 지 어떻게 확인하고 그 탓을 내 탓으로 수용할 수가 있는가?
그 안에 있는 갈등의 근본 원인, 서로 간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여 진정하게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다른 상대방은 그런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이런 진정한 자기 성찰과 포용, 배려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다.
사회적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내 탓이오.'가 아니라, '남 탓을 하기 전에 나부터.', '내 탓일 수도.'라고 바뀌어야 한다.
살면서 누구 하나 완벽하게 살아 가는 이가 한 명도 없는데, 왜 나만 무조건적으로 잘못만 존재하고, 왜 상대방은 아무 잘못이 없단 말인가?
남 탓부터 하는 사회적 풍토가 있기 때문에, 서로 탓만 하다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 하는 사회가 되었고, 이에 대한 반대적 해결책으로 천주교가 남 탓을 하지 말고 내 탓을 하라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헌데, 나부터 양보하고 혈기를 억누르는 것까지 좋은데, 한 편으로 왜 내가 뭘 잘못했는 지를 모르고 억울함을 받아야 할까?
단순히 타는 부침개를 뒤짚 듯이 남 탓을 내 탓으로 뒤집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까?
상호 간에 갈등이 있다면, 우선 간에 감정은 살짝 내려 놓고, 내가 먼저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듣고 상대방의 입장과 견해를 이해하고 나서, 내 입장과 의견을 피력하고 교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고 나서 누구 잘잘못인 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고, 그러고 나서야 잘못을 느끼는 자가 먼저 사과하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 놓여진 상황에서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해하면, 그 때 상대방의 과오는 과오가 아니게 된 것으로 되고, 나 역시도 그 안에 일부 책임소재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오를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상호 간에 근원적으로 풀리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로 책임소재가 확인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 탓이오.', '네 탓이오.'가 되겠는가?
나는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가 억울하기 싫은 것처럼, 상대방을 억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왜 내가 '내 탓이오.'로 억울해야 하고, 왜 내가 타인을 억울하게 해야 한단 말인가?
싫다.
둘 다 싫다.
서로의 입장과 견해를 경청하고, 또 조심스럽게 내 의견과 상황을 피력하면서 상호 간의 생각과 입장을 교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책임소재가 갈리게 되고, 그 때부터 서로를 이해하면서 풀리게 된다.
만일, 서로가 이러한 노력 끝에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 하고, 책임소재를 발견하지 못 했다면, 타인의 중재를 받던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까지 동의하고, 불완전한 차선책으로 합의에 도출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 노력했지만, 진정한 답에 도달하지 못 했으므로 꼭 누구의 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당장에 풀려고 하는 것보다, 서로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현명할 듯 하군요."
비록, 서로 갈등을 완전히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 했지만, 이렇게라도 합의하고 헤어진다면, 이 또한 '양보'와 '존중', '화합' 아니겠는가.
'내 탓이오.'가 아니다.
'네 탓이오.'도 아니다.
누구의 탓만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관점과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경청과 해명의 기저에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양보'의 정신이 깔려 있다.
진짜 '내 탓이오.'를 원하는가?
그럼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난 뒤에 내 의견을 피력하라.
그럼 서로가 진짜 '내 탓이오.'를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