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삶은 후회의 연속이다.
"그 때로 다시 돌아 간다면, 다시는 그런 선택을 안 할 거."라고.
"다시 그 선택지가 내게 주어진다면, 이 번에는 후회 없을 거."라고.
나도 지금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데, 외양간을 고치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소를 잃지 않을 거라 오판한다.
그래서 소를 잃지 않도록 고칠 시간이 충분히 있지만, 그 호기를 놓치고 결국 소를 잃고 만다.
굳이 외양간을 고치지 않더라도 소를 잃는다는 생각을 못 하던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놓치던가.
나 같은 경우, 전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의 반복으로 순환되었다 해도 과하지 않다.
소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이렇게 소를 잃는다는 경험을 얻게 되고, 지금은 소를 한 마리 잃었다 치더라도, 다음에 키우는 소는 과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애초에 소를 잃지 않고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교훈을 얻지 못 한다고 단정 가능하다.
늘 그런 식이었다.
철근값을 아끼려다 부실한 시공으로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
'개미와 베짱이'처럼 젊은 시절을 탕진하다 추하게 노년을 보내는 삶.
자신의 신념이 항상 옳다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다가 잘못된 선택에 빠지는 삶 등.
인류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선대가 희생하면, 후대는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개선하고, 거기서 또 오류를 바로 잡아서 그 다음 후대에 넘겨 주고.
인류가 처음으로 불을 발견할 때, 그 불이 뜨거운 줄 모르고 손을 대다 화상을 입는다.
그 화상을 입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이렇게 불에 손을 대면 뜨겁다."는 지식을 전달한다.
비록, 최초에 불에 손을 댄 자는 화상을 입었지만, 덕 분에 다른 사람들이 화상을 입을 사고를 막은 셈이 된 것이다.
잃은 소는 잃은 게 아니다.
애초부터 그 소는 잃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 서서 걷기를 반복하며 걸음마를 익히는 것처럼, 아기새가 어미새를 흉내내며 비행을 배우는 것처럼, 이와 같다.
그 소를 잃지 않고서야, '이렇게 하면 소를 잃는다.'는 교훈을 얻지 못 한다.
애초에 잃을 수 밖에 없는 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비싼 댓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무언가 배우지 못 한다고 한다면, 더 많은 소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침을 얻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한 마리 소만 잃어도 터득할 것이오, 혹자는 무수히 많은 소를 잃고 나서도 깨우치지 못 한다.
현명한 이는 한 마리 소로도 충분하고, 어리석은 이는 많이 잃고도 깨우치지 못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이제는 깨우쳐야 한다.
잃은 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차피 잃을 소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깨우쳤으면 '앞으로 소를 잃지 않기 위해 뭘 해야 할 것인가?'이다.
그럼에도 깨우치지 못 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소를 잃어야 할 지 모른다.
스스로 소를 잃는 삶을 자초해 간다.
이 걸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잃은 소를 보전해 주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어리석음의 늪에 계속 잠기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