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논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속선 Jul 11. 2023

태백의 지세 1

2020-12-30 17:49:58

백두대간의 가장 정점이자, 동해안선을 타고 남하하던 큰 대간이 남서 쪽으로 트는 전환점이 바로 이 곳, 태백이다. 

시 전체가 해발 700 메터 이상의 고산 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의외로 태백에 와 보면 그다지 고산 지대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주변에 산도 많고, 해발 1000 메터 이상의 태산이며, 그 산들과의 거리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고 한다면, 태백시는 분명히 골이 깊은 고립 도시여야 맞다. 

그렇지만, 그 골 사이사이에 형성된 시내와 마을들도 마찬가지로 해발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1500 메터가 넘는 함백산, 태백산, 그리고, 연화산, 매봉산들도 태산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시골 어디에서나 볼 법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자락 같은 느낌이다. 

어찌 보면, 너른 평야 지대가 한 군데도 없어서 도시가 형성될 수 없는 조건임에도, 예부터 골짜기를 따라 길을 내고, 물자를 들여와 마을과 도시를 건설했던 선조들의 노고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근대에서야 태백이 석탄 산업의 호황으로 사람들이 거주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옛날 중세,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갔을 적에, 인구도 많지 않고, 꼭 태백 땅이 아니어도 다른 살기 좋은 땅들이 많았을 텐데, 왜 선조들은 이 척박해서 농사도 쉽지 않은 첩첩산중에 정착하기로 한 것인 지는 조금 의문이 든다.


해발 지대가 높기 때문에, 자연스레 평균 기온은 낮다. 

강원도가 춥다는 인식이 있지만, 모든 강원도가 그렇지 않다. 

백두대간을 넘어 동해안에 바짝 위치한 강릉, 동해, 삼척은, 내가 한 겨울에 방문해 봐도 한결 따스했다. 

당연히 바다를 면해서 지대가 낮고, 백두대간이 자연스레 북서풍을 막아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온이 낮은데, 태백은 해발이 높고, 태산이 있다고는 하나, 골도 높기 때문에 사시사철 강한 바람을 완전히 면키는 어렵다. 

눈이 자주 올 뿐더러,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폭설 또한 심심찮다. 

수도권에 있다가 태백에 도착하면, 대 번에 기온이 낮은 곳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강원도를 포함, 전국에 가장 추운 곳 중에 한 곳이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한 겨울 새벽에는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위의 절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겨울이 일 년 중 거의 반 나절에 가깝다. 봄, 가을이 잠시란 말이다. 

그러나, 수도권이나 남쪽 지방의 폭염에 시달리는 여름에는, 태백은 상당히 쾌적한 시원함을 누릴 수 있다. 


태백에는 큰 세 개의 개천, 황지천, 철암천, 소도천이 있어서 선조들의 식수, 생활수에 있어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세 개의 개천이 태백시를 마치 둥글게 감싸고 도는 형태이며, 그 가운데에는 연화산이라는 우뚝 솟은 산이 차지해 들어 섰다. 

태백 시내에 위치한 황지 연못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현재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백두산을 왕래하지 못 한 까닭일까. 

백두산을 비견하는 산으로 태백산, 그 천지를 비견하는 못으로 황지 연못을 들지만, 아무래도 그 장엄함에는 다소 못 미치는 듯 하다. 


이 황지 연못에는 황부자의 전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그 옛날 황부자 집에 어느 승려가 찾아 와 시주를 청하였으나, 도리어 괘씸하게 여긴 황부자가 쌀 대신 소똥을 바랑에 넣었다. 

이를 본 며느리가 안타까이 여겨 몰래 쌀을 주니, 승려는 이 집은 곧 망할 터이니 떠나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린다. 

가는 동안에 절대 뒤를 돌아 보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며느리는 승려의 말대로 뒤도 안 보고 가던 중, 갑자기 벽력 소리에 놀라 뒤를 보고 만 며느리는 돌로 변하고, 황부자가 살던 터는 지금의 황지 연못이 되고, 황부자는 그 연못의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나는 이 전설을 신용하지 않는다. 

그저, 민중들에게 선량하게 살길 바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덧붙인 거라 믿는다. 

어쨌건, 시에서 이 전설을 토대로 황지 연못에 꾸몄으니, 방문하는 이들에게 작은 재미를 주고 있다. 


이 연못이 태백을 가로 지르는 황지천을 이루고, 낙동강까지 이어 지는 것이다. 

태백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함백산 금대봉에는 한강의 발원지라 일컬어 지는 검룡소가 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젖줄인 한강. 

세계 어느 나라도 이토록 큰 강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강은 크다는 의미이다. 

그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 연못,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진 태백은, 도시의 발전 여부와 관계 없이 충분히 대한민국 금수강산 터전의 상징성을 지닌 성소라 할 만 하다. 

만일, 이 두 발원지가 없다면 강을 형성할 수 없고, 이로 인한 물의 공급 또한 불가능하고, 이로 인해 사람이 모이지 않아, 문명을 발달할 수 없었다. 

강을 괜히 젖줄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민족의 큰 두 개의 강, 낙동강, 한강의 시원인 태백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와서 우리의 국토, 터전을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져 봐야 한다.


태백하면 산을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산에 대해 얘기하자면 많이 길어 질 듯 하다. 

우선,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태백산이 있는데,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 시대의 일성왕이 친히 북상하여 제를 올렸다고 전해 지며, 그와 빠질 수 없는 것이 국조 단군 신화이다. 

단군 신화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터라, 자세한 내용은 넘어 가도록 하고, 신화 속 산은 실제로는 백두산이라고 하는데, 어쨌건 태백산이 백두산에 버금가는 산의 위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분단의 상황에서 백두산이 북한 쪽에 있다 보니, 그러한 상징을 대신할 산이 필요했고, 태백산이 그 상징 역할을 대신하게끔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영산이라는 칭호는 아무 산에나 부여되지 않는다. 크다고 다가 아니다. 

한라산도 태백산보다 충분히 크고, 설악산도 크지만, 영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태백산이 가진 특별한 기운이 있는 듯 하다. 

왜 영산이라고 하는 지에 대해 더 파고 들어가 보자. 

왕이 제를 올리기 위해 친히 태백산에 북상했다는 점부터 보자. 

당시에 신라 영토이기는 했으나, 왕이 어째서 힘든 산길을 직접 올랐는가 말이다. 

그 당시에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았을 뿐더러, 차도 없어서 직접 걷거나 말에 의존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것은 매우 쉽지 않은 결정이다. 

산은 당시 신라 영토만 따져도 많이 있었다. 

구태어 제를 올리기 위해 태백산에 온 이유는 분명히, 당시 사람들도 태백산의 신성하고 큰 힘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냥 큰 흙덩어리가 아니란 것이다. 

당시 선조들이 나라의 큰 변고나, 중대한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대자연의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예사롭게 한가히 제를 올린다 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왕이 직접 태백산까지 온 것이다. 

즉, 기도를 해서 민중들이나 부족장이 대자연에게 고충을 토로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태백산에 오는 것이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명산은, 경관이 수려하거나, 뭇 대중들이 산을 즐기며 일상의 수고로움을 회복하는 정도라면, 영산은, 그 것을 뛰어 넘는 영적인 힘을 지닌 산인 것이다.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 장군단, 하단이 그 것인 것이다. 

산 중에 제일 높은 정상에서 자신의 염원이 마치, 하늘과 가깝게 들리길 기대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태백산에서 기복 행위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변에 아예 거처하는 무속인들도 많고, 천제단에는 등산객과 기도를 하는 승려, 무속인들이 끊이지를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춘양면 의양리의 지세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