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 온전한 나의 텃밭

2024 텃밭일지

by 솔솔

온전한 나의 텃밭이 생겼다.

'온전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혼자 텃밭을 가꾸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텃밭과의 인연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내 기억 속 첫 텃밭은 수경재배로 딸기를 재배하던 비닐하우스였다. 그 텃밭은 텃밭 자체보다 그곳을 가던 길로 기억된다. 그곳은 꽤 오랫동안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가늠해 보더라도 족히 30~4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이니 어렸을 때 걸음으로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테다. 할머니 손을 잡고, 집에서 출발하여 큰 찻길을 지나고 굴다리를 지나던 텃밭 가던 길. 그것이 첫 번째 텃밭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그마저도 가는 기억만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올 때는 할머니 등에 엎여 잠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분명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와 함께 간 적이 더 많았을 텐데 이상하게 할머니와 단 둘이 갔던 그날의 기억만이 남아있다. 아마도 어린 나에게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를 독점할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일구었던 주말농장의 텃밭이 있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은 추첨으로 3평 또는 5평의 밭을 분양받아 4월에서 12월까지 작물을 심고 재배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종종 아주 커다란 비행기를 볼 수 있는 그 주말농장을 꽤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나는 가끔 날이 좋거나 심심할 때 자발적으로, 혹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 동원되어 그곳에 가곤 했다. 그곳에서 수확한 것을 먹고 즐겼지만, 그 텃밭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텃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코로나 시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닥친 전염병의 위협은 나에게 특히 '기후위기'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그때 직장에서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텃밭을 소재로 선택했다. 프로젝트 팀원들과 함께 고구마, 콩, 토마토 등을 재배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작물을 재배하는 기쁨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씨앗에서 쏙쏙 올라오는 새싹이, 일하며 흘린 땀을 부드럽게 말려주는 시원한 바람이,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음에도 땅과 해와 비의 힘으로 꿋꿋하게 자라나 기어코 맺은 열매가 너무 경이롭고 새로웠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시기에, 내가 돌보는 것이 눈앞에서 구체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 뒤 직장에 밭이 있으면 그 밭에서, 밭이 없으면 텃밭상자를 구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 심고 길렀다. 텃밭이 주는 재미를 알고 난 이후, 가족이 하는 주말농장도 조금 더 개입하여 가꾸기 시작했다. 상추류, 바질, 감자, 방울토마토 등이 단골 작물이었고, 어떨 때는 고추, 수박, 당근, 배추, 무, 백일홍, 안개초를 심기도 했다. 종종 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심고 관찰하고 돌보는 일이, 그리고 그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4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올해 3월, 나는 다른 지역에서 첫 독립을 시작했다. 혼자 사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집안일에 대한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은 텃밭 상자 한 두 개 정도만 가꿔보자 생각하던 차에 길가에 붙은 플래카드가 눈이 띄었다.


"도시텃밭을 시민에게 분양합니다"


생각보다 한가로운 일정에 무료했던 나는 결국 플래카드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여 틀밭 하나를 분양받았다. 그렇게 나는 '온전한' 나의 텃밭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름의 무성함이 벌써부터 걱정되긴 하지만, 방치로 인한 제멋대로의 텃밭도 나름대로 아름다우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곳에서의 첫 기록으로 텃밭일지를 남겨보려 한다. 나의 텃밭이, 그리고 그 기록이 나에게 무엇을 남길지 기대하며...


IMG_3088.jpg 초여름 주말농장
비행기가 낮게 날던 주말농장 / 내가 애정하던 안개초
방치의 결과_쑥갓 꽃과 고수 꽃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