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엔 금이 가 있다. 빛은 거기로 들어온다.
야트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언니는 이 곳 어딘가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이윽고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잡힌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언니가 보였다. 겨울 날씨와 대비되는 따뜻한 조명 속에서 언니는 편안해보였다. 언니를 만나는 게 5년만이었던가.
“언니, 오랜만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니의 공간은 좋은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며 활짝 웃는 언니를 보니, 10년 전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꿈에 부풀었던 그 때의 추억들이 물밀 듯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너희들, 오늘 수업 끝나면 언니가 역까지 차로 태워다 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 대학에서였다. 언니는 늦깍이 대학생으로 입학해 누구보다 성실하게 공부를 했었다. 그때 언니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대학시절 나는 마음 맞는 친구 두 명과 삼총사처럼 모여 수업을 듣곤 했다. 그리고 입학 후 얼마 안 돼, 우리 삼총사는 언니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렸던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카리스마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큰 키에 예쁜 얼굴, 이미 직장까지 다니던 신분의 언니는 삶의 확신으로 가득 차 보였다. 언니의 모습은 우리가 서른을 맞이했을 때 닮고 싶은 미래였었다. 수업이 끝나면 언니는 우리를 역까지 바래다주었고, 우리가 차로 함께 이동한 거리만큼 우정도 깊어졌다.
"잘 지냈니?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언니, 저는 요즘 숨고르기 중이에요.”
“삶에서 꼭 필요한 순간이야.
불안해하지 말고 즐겨.”
나무 식탁을 두고 마주 앉은 언니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의 공간을 향기로 가득 채운 건 나무 건조대에 세워진 수제 비누였다. 언니는 수제 비누를 만드는 공방을 차리고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의 위로가 진실 되었다는 건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삶의 확신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던 언니에게도 그 당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삼총사와 언니는 함께 학기를 보내면서 우정이 쌓여갔고, 자연스레 인생의 한 부분들을 떼어 나누곤 했었다.
우리의 전공은 호텔경영이었다. 곧은 자세로 교수님을 대하는 언니의 상냥하고도 자신 있는 태도를 볼 때면 ‘진짜 어른’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우리는 시험 기간이면 언니 집에 모여 다 같이 밤 새워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때 쏟아지는 잠을 깨려고 라디오에 문자로 사연을 보내기도 했는데, 종종 우리 이야기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1학기 기말고사였을까. 늘 그랬듯 삼총사와 언니가 모여 시험공부를 하던 중에 언니가 삶의 귀퉁이를 들려주었다.
“언니, 학교는 왜 오게 된 거예요?”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꿈과는 거리가 멀었던 직업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매장 정리를 하게 됐고,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도전하게 됐지. 나이 들어서 어린 친구들과 공부하려는 마음이 쉽진 않았지만 더 늦을 순 없다고 생각했어.”
언니가 내려준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시험 공부하던 그때가 떠올라 물었다.
“언니, 저희 시험 공부하면서 라디오에 사연 보냈던 거 생각나세요?”
“우리가 사연만 보냈니? 툭 하면 잠깐 쉬자 하고 맥주 마시면서 보낸 시간도 재미났지.”
“그래도 모두 성적이 잘 나왔었어요.”
“할 땐 또 했잖니.”
“제가 어느새 언니 학교 입학하던 시절의 나이가 되었어요.”
“이제 시간 더 금방 갈 거다.”
“제가 그 시절 언니 나이가 되어보니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쉽질 않아요. 공부를 결심하고 학교에 입학한 언니가 참 대단했구나 싶어요. 언니는 학교생활이 힘에 부치진 않았어요?”
“왜 안 그랬겠어. 그때는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 잡았었고 고민 끝에 도전한 거였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단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힘을 낸 거야."
상처를 내보이지 않고 무덤덤하게 우리 삼총사를 이끌어줬기에 언니가 가졌던 힘든 시간들은 듣기 전까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시절 언니의 나이가 되고 나서 그때의 언니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난 여전히 언니가 내 나이 때에 보여준 삶의 의지를 부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랜만의 만남으로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니가 뒤늦게 학교를 가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었지. 난 그때 충분히 젊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건 두렵지 않았어.”
“언니, 그나저나 몸은 이제 괜찮아요?”
“그럼, 다 나았지.”
언니는 어느 날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결핵을 앓게 되었다. 사실 언니의 아팠던 시간들은 잘 알지 못한다. 언니가 잘 내비치지 않았었고, 우리는 그만큼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그만큼 사회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을 거다. 바쁘게 살다 지나간 추억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니 이렇게 웃으며 마주 앉은 것이다.
“언니, 서비스 강사 일을 즐겁게 했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수제 비누 공방을 차리게 되었어요?”
“서비스 강사 일은 무척 즐거웠어. 나의 가족들을 돌아볼 새도 없을 만큼 일이 바빴지만 그게 문제가 될 거란 걸 모를 정도로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찾은 친척과 지인들은 언니가 할머니의 딸인 줄만 알았다고 했단다. 그만큼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언니가 목 놓아 울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었어.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인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어. 특히 바쁘게만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됐지.”
언니가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삶의 우선순위를 매겨보니 가족은 두 번째에 놓여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서야 진짜 소중한 건 가족인데, 내 가족을 위한 시간을 회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스스로를 사랑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 위해 언니가 선택한 것이 바로 수제비누였다고. 배움에 누구보다 부지런한 언니는 아로마 협회에서 향에 관한 기초부터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의 공방을 차리게 된 것이다. 언니는 처음 수제 비누를 배우면서 돈을 벌기 위해 좋지 않은 커리큘럼으로 비싼 수강료를 받던 개인 강사들에게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였다. 우리 삼총사는 시험을 끝낸 기념으로 언니네 집에 모였다. 이 날 우리가 언니네 모인 주된 이유는 영화 관람이었다. 우리를 모이게 한 영화는 2007년에 개봉한 <향수>였다. 영화의 내용은 천재적인 후각적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 장그루누이가 어느 날 맡게 된 여인의 향기에 매료되어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나는 향기를 향수로 구현하는 과정이 담겨있었다. 매혹적이었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언니는 우리에게 주변에 향을 풍기는 그런 사람이 되자고 말했다. 이때 우리가 본 영화 <향수>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특별한 영화 한 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언니가 좋은 향을 뿜어내는 이 공방에 앉아있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비누는 만들고 나서 40일 정도 건조하는 시간이 필요해. 그 인내의 시간을 지내고 나서 완성된 비누를 보면 얼른 집에 가서 세수가 하고 싶어져. 향기 좋은 비누에 물을 묻혀서 거품을 낼 때 기분이 참 좋아. 비누는 더러운 것을 씻어주지만 나에겐 힘든 시간들도 씻어내 주는 것 같아서 이 일에 더 매진했어.”
점심시간에 언니의 공방을 찾았건만 금세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를 결속시켜준 대학 시절 교수님도 찾아와주셔서 아련했던 그때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나누기도 했다. 향기 나는 언니의 공방에 들어온 후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아 참 행복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언니가 들려줬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힘이 들 때면 누구보다 나를 응원하는 가족들을 생각해.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인간시장>의 저자인 김홍신 작가의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어. 그때 작가 분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라.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그 답은 희망이라는 결말을 남기는 삶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이겨내고 감동이 있는 삶. 대중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되는 걸 가장 바라니? 해피엔딩이야. 드라마를 보면서 해피엔딩이 되길 바랐던 염원처럼 우리 삶이 행복해지길 바라면 좋겠어. 그만큼 바라면 노력하게 될 테고, 자연스레 재미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이날 언니의 공방을 찾은 건 삼총사 중 두 사람인 나와 한 친구였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현재 무직 상태였고, 언니의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다소 걱정 어린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은 잠시 쉬는 중일뿐이야. 언니는 너희들 나이에 학교를 들어가서 너희를 만났잖아. 그리고 새 삶이 시작됐어. 힘들다고 숨지 말고 용기 내서 종종 얼굴 보여주렴.”
세상에 움츠리고 있다 보면 나 자신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 사실은 혼자 생산적인 고독의 시간을 보내 봐도 알 수 있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잠깐 나눠 봐도 알 수 있다.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고 지혜롭게 인생의 나침반을 돌린 언니가 무척 멋있어 보였다. 인생의 새로운 길목에서 지체 없이 도전했던 그 시절 언니의 용기가 나에겐 있을까?
집으로 돌아 와 언니에게 받은 수제 비누를 욕조 옆에 두었다. 깨끗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뜨거운 김이 서려 있었다. 뿌옇게 김 서린 거울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대학생 시절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언니의 이야기들을 적으며 떠 오른 문장은 시인이자 가수인 레너드 코헨이 노래한 한 대목이다.
세상 모든 것엔 금이 가 있다. 빛은 거기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