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안녕'이라고 했을 때부터 난 당신에게 빠졌어요."
대전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정확히 두 가지로 통일되었다. 하나는 “성심당 가려고?” 그리고 두 번째는 “대전에 볼 게 있어?”. 그리고 실제로 두 이유 모두 완벽한 정답이었다. 나는 빵을 먹는 기쁨 하나로 대전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고, 국립중앙과학관 하나만으로 볼거리가 충분했다고 말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정말 하필 내가 여행했던 순간의 대전이 우연을 가장한 수많은 아름다움의 연속에 휘말리게 해 버려서 이 근사한 도시를 이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큰 오류였는지 깨달았다.
근데 아무래도 좋다. 그냥 이 도시가 얼마나 나를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떠들고만 싶다.
대전에 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대전국립중앙과학관‘이다. 엑스포 이후 지어진 과학관은 과학의 발전을 따라 아주 오래된 자연사 박물관부터 A.I와 드론, VR 등을 활용한 체험전시관까지 그 규모가 제법 방대하다.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필름 카메라에서 본 듯한 익숙한 세월의 흔적과 손으로 그려낸 듯한 안내도를 보고 있자면 마치 추억의 공간으로 되돌아온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마음은 활짝 열리고 동심 어린 호기심이 마구 솟는다. ‘국립‘의 가장 큰 장점은 대부분이 무료라는 것이다. 93년 당시 엑스포장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관람객을 실어 날랐던, 녹이 슨 한국 최초 모노레일의 원형을 관람하거나, 한반도에 공룡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이제는 믿어 의심치 않는 자연사 박물관의 거대한 뼈 모형과, 무선 충전기가 충전되는 원리, 음파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과학 체험을 즐기는 데는 어떠한 비용도 들지 않는다. 유료로 즐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많지만 대부분이 무료다. 유일하게 즐겼던 유료 프로그램은 거대한 스크린 돔이 있는 천체관에서 누워서 11월의 별자리를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역시도 가격이 이천 원 정도였다. 바로 전날 대전의 밤하늘에서 관측된 한 별자리는 긴 정사각형에 다리가 3개 달려 있는 모양으로 나로서는 고작 문어 아니면 오징어 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어떤 친구가 매생이라는 천재적인 답변을 해버려서 그곳에 있는 모든 관람객을 단 한 번에 웃겨 버렸다. 즐거운 기억은 장기기억이 되어 오래 남는다. 덕분에 나는 저 별자리를 평생 기억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페가수스자리’였다.
주말인데 날씨가 워낙 좋았던 탓인지 과학관 자체는 매우 한산했고 대부분이 어린 친구들이었다. 팻말을 보지도 않고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며 자신의 공룡백과사전을 들고 다니는 아이나 과학관에 비치된 서적코너에서 진지하게 탐독 중인 친구들과 비치된 오락기를 시켜달라고 조르는 친구들까지. 자주 방문했던 건지 관람을 종용하거나 아이들끼리의 담론에 끼어들어 굳이 정정하는 부모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어른인 나도 이곳에서 무려 3시간 가까이를 머무르고 말았다. 어릴 적 모두의 집에는 꿈돌이 굿즈가 하나씩은 있었다. 25년인 지금도 반짝이는 별을 달고 다니는 수많은 꿈돌이들이 여기서 미래를 꿈꾼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가 위치한 곳은 유성구로 대전과학엑스포가 열렸던 곳이다.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엑스포 공원의 첨탑만은 남아 여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연구단지도 이곳에 모여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에는 기차역과도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지만 이곳에 모 브랜드의 시티호텔이 세워진 것은 이유가 있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맑은 갑천이 흐르고 조금만 걸으면 엑스포 과학 공원이고 또 거기에서 엑스포 다리를 건너면 한밭수목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중요한 성심당 컨벤션 점이 바로 건물 맞은편에 자리해 있다. 성심당에 맛에 대한 의견은 워낙에 분분하지만 빵 하나만으로 이 수많은 사람들을 대전에 발걸음 하게 만든 파급력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고 빵 하나하나 아낌없이 재료를 썼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묵직함이 다가왔으며 그럼에도 5년 전에나 볼 수 있던 가격대도 그러했다. 내부 크기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불친절한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참새가 되어 방앗간 마냥 드나들었는데 게 중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역시 '주먹밥'이였다. 이른 아침 나오는 시간에 맞춰 손에 쥔 따끈따끈한 주먹밥을 우물거리는 아침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나는 역시 밀가루보다는 쌀에 더 큰 포만감을 느끼는 한국인이었다. 성심당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긴 이 빵집은 당일 생산하고 남은 빵들을 여전히 지역 사회에 후원하며 윤리적 경영을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빵집의 영업이익이 대기업 빵집의 영엽이익을 넘었다는 기사를 얼마 전 보았다. 이 빵집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0년이 지나도 따끈따끈한 주먹밥을 먹기 위해 나는 2시간을 달려 이곳에 와야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발걸음 할 것이다.
대전의 옛 지명은 한밭. 이름에서도 유추 가능하듯 사방이 트인 거대한 평야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내륙의 중심에 있다 보니 바다나 산을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풍성한 가을을 대전에서 한가득 맞이하고 왔다. 해지기 전 아름다운 갑천을 구경하기 위해 나섰더니 강변에는 잔뜩 만개한 백일홍 축제가 한창이었고 심지어 거대한 열기구가 오르내리며 타고 싶은 방문객 누구나 비용 없이 하늘로 두둥실 띄워주고 있었다. 마침 노을이라는 필터가 따스하게 +10 정도를 가미해주고 있었으니 이게 무슨 낭만의 계절인지. 핫도그를 사서 말 그대로의 길빵을 하며 아침 산책 겸 들른 한밭수목원은 내 상상이상보다 규모가 거대하여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개인 사유지의 정원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도심의 소음은 멀어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가득했으며 나누는 우리의 말소리도 조곤조곤해졌다. 1시간을 넘게 돌았는데도 수목원을 나오니 내가 본 것이 겨우 수목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머지 반절은 수목원 관리를 위한 정기 휴무였는데 정원사분들께서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화분을 다듬고 계셨다. 산책을 마치고 엑스포 다리를 건너니 분주한 도시의 소음이 생동감이 되었다.
대전에서 1박 이상을 머무른다면 시간을 내서 꼭 ‘장태산 자연 휴양림’에 방문해 볼 것을 권한다. 최초의 개인 사유림이었던 이곳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는 대전시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높고 빽빽이 자라난 메타세쿼이아 숲은 햇살마저 고르게 뻗지 못하고 그 틈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있다. 정상에 올라 전망대를 관람할 것이 아니라면 가파른 산책로도 없어 고됨 없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으며 숨 쉬는 것만으로 마음도 정신도 치유되는 공간이다.
가장 키가 작은 탓에 비집고 들어온 햇살을 온전히 맞아버려 혼자서만 황금빛으로 두드러진 나무의 풍경이 오래된 유화 같았다. 이 날의 관람객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는데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는지 의문이어서 검색까지 해보았지만 출처를 알기 어려웠다. 끊임없이 눌러지는 셔터소리를 들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이곳이 퍽이나 아름다웠던 듯하다. TV에서 흔들 다리 이론이라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흔들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심박이 올라가는 현상을 체험하고 난 뒤 상대를 마주하면 이를 두근거림과 착각해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낄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론이었는데 엇비슷한 출렁다리를 건너는 어른들 모두 깔깔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니 호감은 몰라도 도파민은 충만해 보였다.
11월, 엑스포 공원에서는 와인축제와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어서 모두가 손에 와인 한잔씩을 쥐고 낭만의 선율에 몸을 맡긴 채 낙엽잎 마냥 가을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저녁 시간대마다 진행되는 음악분수쇼를 보기 위해 왔을 뿐인데 이쯤 되니 누군가 나만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요즘 대세인 아이돌 노래로 시작해서 버스 안에서로 이어져 London Night과 더 크로스의 곡으로 마무리된 선곡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나이불문하고 즐거울 수밖에 없었고, 장판 깔린 매끄러운 갑천 위로 아름다운 유성구의 야경이 반사판을 댄 듯 한층 더 반짝였다.
엑스포 다리를 건너기 전 한 플래카드를 보았다. '대전 관광공사 우수 관광공사 선정'. 그리고 그제야 내가 왜 이 도시에서 극빈한 대접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알게 되었다. 2박도 되지 않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발에 차인 모든 것들에 단 하나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계획 없이 어디로 향하더라도 이 도시에 젖어들 수 있도록 사람들은 모든 곳에 아름다운 우연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이 환대를 누리기 위해 나는 단 한 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전의 따릉이 '타슈'는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 1시간 이내라면 느린 발걸음 대신 어디든 무료로 도심을 누비게 해 주었다. 바퀴는 긍휼 한 자들을 굽어 살피는 선교자의 자애로움으로, 누구나 자연을 향유하도록 가꾸는 사람들의 손길로, 모두가 꿈을 꾸도록 활짝 열려 있는 박물관으로 힘차게 나를 인도했고 결국 내가 탄 것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되고 말았다. 나란히 누워 반짝이는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던 수많은 꿈돌이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도시가 그리하였듯 귀천 없이 모두를 널리 이롭게 할 것이다. 손에 쥔 것 하나 없이도 사람은 사람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