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닌 ‘생활’을 타국에서 해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한 학기 동안 ‘파견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내 영어 실력을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재학 중이던 대학교에서 새로운 파견학생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시도하면서, 나 같은 학생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모님의 금전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고려할 수 없는 기회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십여 명의 학생들이 같은 학교로 파견되었는데, 나는 일찍부터 내가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교환학생’과 ‘방문학생’의 특징을 섞은 중간적 개념의 신분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다른 학생들은 출국을 앞두고 적잖이 들떠 있었다. 어디에서 거주할 것인지,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학기가 끝나면 어디를 여행할 것인지 고민하며 한없이 설레 보였다. 반면에 나는 나날이 늘어나는 불안함과 초조함, 두려움과 무서움 사이에서 타지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파견학생을 다녀오면 그 전의 나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강하게 성장해 있으리라 믿었다. 그 이유로 너무나도 비싼 극기 훈련을 자청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경험이 소위 말하는 괜찮은 ‘스펙’이 될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생각도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당시에 사귀던 남자친구도 용기를 내게 한 작은 요인이기도 했다. 파견학생 때문에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지면 공익 근무를 하던 남자친구가 복학할 때까지 학교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남들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파견학생을 지원했기 때문일까, 나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조금은 남다른 미국 생활을 했다. 미국으로 떠난 날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한국이 그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말 다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미국에 살았던 약 반 년간의 시간 동안 ‘다름’이 주는 불안감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것은 꽤나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당시에 썼던 글**을 살펴보면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아래 글은 내가 2012년 8월 29일 싸이월드에 작성한 것으로, 어떠한 수정 없이 전문을 그대로 가져왔다.
미국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고 나서 내가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것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와 ‘상대적인’ 무엇인가가 주는 다양한 감정의 기복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곳에서 한국에서의 ‘너’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신나게 살다 오라고 말했었는데, 나는 이곳에서 어떤 것이 솔직한 ‘나’였는지 깨닫는 중이다.
한때, 미국으로 떠날 시간은 다가오는데 너무 무섭고 겁만 가득할 때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정 영어가 안 통하고 그곳 생활이 어렵고 재미도 없다면, 그동안 못 썼던 글이나 카페에서 혼자 실컷 쓰고 오자.’
거짓말 같게도, 그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누가 보면 그 비싼 돈을 들여서 그런 생각이나 하냐, 라고 하겠지만 결국 이게 나다.
교환학생 생활을 가장 ‘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쉼 없이 달려온 7학기, 그 고민과 압박에서 떠나왔다 생각했는데 정작 이곳에서 부딪히는 건 ‘상대적인’ 비교, 비교, 또 비교다. 상대적인 영어 실력, 상대적인 정보력, 상대적인 인맥 등등.
다수의 새로운 클럽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귄다, 이것은 절대적인 유학 생활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만약 버겁기도 하고 소수의 사람들, 소수의 내 관심사를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싶다면 그것은 비겁한 도피일까?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기도 어렵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상대적’인 비교 속에선 한없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누누이 ‘나’를 찾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곳에서 찾은 ‘나’는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싶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가까이 있고 싶고, 모국어를 그리워하는, 여전한 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싸이는 꽤나, 아늑하다.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남들과 다르면 안 된다는 사회적 시선이 유독 강하게 존재하는 듯하다. 다수의 취향이 ‘보통’의 기준이 되고, 거기에 속하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인식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어떻게 보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한두 달간 ‘내면의 홍역’을 치른 뒤에야, 남들과 다른 것이 당연한 일임을 받아들였다. 그 점을 인정하고 나니, 나를 옭아매던 다수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잘 적응하지 못해도 괜찮다, 마냥 즐겁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놓치고 있었던, 나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었던 소소한 행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임이나 파티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여행하는 것처럼 역동적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Bear House’라고 불리던, 나와 룸메이트 언니가 살던 하숙집에 앉아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것. 또는 수업이 없는 날 집 근처의 작은 카페에 가서(아마도 ‘Sack’s Coffee’라는 이름의 가게였던 것 같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는,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글을 쓰는 것. 그뿐이었다.
관점을 바꾸니 정말이지 도처에 낭만이 가득했다. 물론 그리 많지 않았던(하지만 따라가기는 힘들었던) 수업과, 한국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내가 챙겨야 할)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연들로부터의 ‘강제적인 분리’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행복이었겠지만 말이다.
고독한 자유가 비처럼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일상을 알알이 꾸려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종일관 한국이 그리웠다. 그래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밟을 때 한글로 적힌 그 모든 안내문들이, 그 모든 직원 분들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감정적으로 한국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파견학생을 다녀 왔음에도 가장 바뀌지 않은 사람, 혹은 아예 다녀온 것 같지 않은 사람으로 꼽히고는 했다.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곳이 기왕이면 객관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나라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오죽하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소설이 출간되는 시대이겠는가!
*** 2015년에 출간된 소설가 장강명의 장편소설이다. 최근 한국 문학계의 가장 ‘핫’한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고, 제목이 준 충격이 너무 강렬해서 곧 읽어 보리라 벼르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미운우리새끼〉라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지금은 하차한 허지웅 씨가 친동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족이라서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우리나라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고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모국이라서가 아니라,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애정을 납득할 만큼 한국이 좋은 나라였으면 싶은 것이다.
사실 미국에 살고 있던 당시에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나에게 투표권이 생긴 이래 첫 대선이었다. 그래서 재외국민투표까지 신청해 놓았건만, 투표소가 워낙 먼데다 가는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 정말 부끄럽게도 투표를 못 했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흘러, 내일과 모레는 제19대 대통령선거의 사전투표 기간이다. 교훈적으로 보이게끔 글을 끝맺는 것이 너무나도 싫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야 할 것 같다.
더 좋은 나라를 위해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