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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n 07. 2017

문송합니다만, 국문학도입니다

현재 진행형 자서전 1

나는 ‘범생이’였다.

자뻑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고로 나는 열심히 공부하며(보기에 따라서는 공부만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리나라의 입시 제도를 비판할 시간도, 그럴 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어쩌면 그 속에서 내가 빛을 볼 가능성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쉽게 순응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 이토록 자기중심적이다.

  또한 나는 완벽한 ‘인문계’ 성향의 학생이었다. 당시 인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학과는 단연코 ‘법과대학’ ‘경영대학’이었다. 이렇게 두 개의 단과대학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포자(경제 포기자)’였던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법과대학 하나뿐이었다. 나는 남들이 보기에 그래도 좀 ‘있어’ 보이고, 공부한 것이 조금은 덜 ‘아깝게’ 느껴지면서, 내 적성과 교점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진로 희망 조사 때마다 법과대학을 적어 내고는 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법학을 공부하는 지인들을 주변에서 보고 있노라니그 당시의 내 생각은 틀려도 한참 틀렸던 것 같다.)

  그런데 아뿔싸,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버렸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2009년부터 로스쿨 제도가 시행되면서, 법과대학이 없어진다는 게 아닌가! 이렇듯 인생이란 얼마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지. 

  여하튼 그렇게 나는 법학도가 되려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라에서 법과대학이라는 선택지를 친히(?) 없애 주어서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진로를 바꿀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가라는 신의 계시구나.’라고 합리화하며, 기쁜 마음으로 비인기 학과로의 진학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랬다, 나는 소위 말하는 ‘문청(문학청년)’이었던 것이다.




  뜬금없지만, 이쯤에서 내 아버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시절의 내가 문청일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누구보다도 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동차 부품 회사에 재직 중인 회사원이시다.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 형편과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셨고, 지금과 같은 삶의 궤적을 그려 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스스로가 말씀하셨듯이, 당신의 적성대로라면 문학을 전공했어야 할 분이었다. (그 시절 이러한 역사를 지닌 우리네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으셨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는 어렵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글을 쓰는 것이 정말로 좋으셨는지, 홀로 습작을 계속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은 시조 시인으로 등단까지 하게 되셨고, 직장을 다니는 와중에도 동인지나 문인협회 활동을 병행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글에 대한 열망과 감수성은 분명 나에게로 전해졌을 터였다.

  어쨌든 아버지가 문인협회 회원이셨던 덕에, 나는 어려서부터 ‘백일장’이라는 것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나는 심사위원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백일장에 종종 놀러 갔고, 그 김에 글을 써서 내 보기를 반복했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부문의 심사를 맡으셨다.) 그렇게 백일장에 참여한 횟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상을 받는 일이 빈번해졌다. 즐기고 노력한 만큼 ‘상’이라는 보상이 따르고, 내가 살던 지역에서 나름대로 ‘글빨’을 날리게 되면서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좋아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잘하는 (듯 보이는) 것을 좋아하기가, 어린 나에게는 제일 쉬운 일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운이 좋았다. 글에 대한 나의 애정을, 자그마한 재능을 귀하게 여겨 주시는 국어 선생님들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문학과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은 채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에게 다양한 글을 써 보도록 권유하셨고, 여러 대회에 참여할 수 있게 지도해 주셨으며,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게끔 격려해 주셨다. 그래서 법과대학을 운운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당시에도,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평생 글을 쓰면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그만큼 글쓰기에 대한 확신이 당시에는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문학청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나 혼자서는 절대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와중에 법과대학이 사라졌으니, 나는 자연스레 ‘국어국문학과’로의 진학을 고려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글쓰기를 좋아하면, 책 읽기를 즐기면 으레 국문학도가 되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판을 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실 알았다 해도 십 대 때의 넘치는 패기로 신경 쓰지 않았을 듯하다.) 그 이후 수능 시험을 치고, 대학 입시의 과정을 거쳐서 나는 가장 가고 싶었던 어느 대학교는 아니었지만그래도 그만큼 가고파 했던 한 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 전까지 등단하지 못하면 알아서 먹고살 길을 찾겠다고 부모님께 큰소리를 치면서 말이다.

* ‘문과여서 죄송합니다’를 줄인 말이다. 취업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인문계 졸업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만약 그때 법과대학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쩌면 돌고 돌아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덕분에 내 적성과 흥미에 더 부합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우리네 삶 속에는 내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수많은 요인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지.

누구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있다.

그것은 가 보지 않았기에 남아 있는, 많은 부분에서 미화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결국,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충실한 그리하여 미래의 후회를 최대한 줄여 주는 선택이 아닐는지.

  그렇게 나는 내 전공을 결정했고, 아직까지는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 역시 내 전공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속으로 무척이나 기쁘셨다고 한다. 대를 이어 온 적성이었다. 이렇게 나는 국문학도가 되었다. 꽤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한 달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브런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의 글을 통해 설명해 드릴 예정입니다. 그동안 기다려 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더 진솔한 글로, 더 고민한 모습으로 매주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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