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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20. 2017

여행이 싫을 수도 있잖아요

  몇 년 전 회사를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다가왔고, 나는 친한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 날의 저녁을 함께할 예정이었다. 제대로 기분을 내 보자며 드레스 코드까지 ‘빨강’으로 맞춰 놓았다. 그런데 빨간색이 군데군데 들어간 원피스를 입었기 때문인지 회사 사람들이 오늘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하루 종일 물어보는 것이다. 

  “친구랑 집 근처에서 놀 거예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난 또 어디 특별한 데 가나 했네.” 

  나는 그때마다 집 근처가 어째서 특별한 곳이 될 수 없는지 소심하게 항변하고 싶었다. 물론 새삼스러울 게 없는 장소라는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상경한 이래 쭉 살아온 동네였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집 근처는 크리스마스이브와 같이 특별한 날에 실패할 위험이 없다는 점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미 온갖 맛집을 속속들이 꿰고 있으므로 굳이 모험할 필요도 없다. ‘익숙함’이 준 특별한 선물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익숙해지고 난 뒤에만 느낄 수 있는 아늑함과 평온함이 있다. 나는 거기에서 비롯된 특별함을 만끽하는 게 좋았다.

새로움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고,
익숙함을 고대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집순이(혹은 집돌이)’족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리 집이나 동네를 대체할 만한 특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나 같은 집순이가 자신의 성향대로 살아가기에 썩 자유로운 터전이 아닌 것 같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막상 그 이유를 명확히 집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한 나날을 보내던 찰나, 나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해 주는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잘 왔어 우리 딸》이라는 에세이집*이었다.

나는 동네를 빨빨거리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여행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역시……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랄밖에. 그러니 땅콩이 네가 더 자라서 아빠에게 이렇게 묻는 날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빠, 어디 가?” 아빠는 되도록 어딜 안 가고 싶은데 생각처럼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 누군가에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하고 나면, 여행에 관한 그 지긋지긋한 화제가 바뀌기는커녕 여행을 기피하는 정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해서 아빠는 아주 진땀을 뺀다. 아무리 설명해 봐야 상대방은 이렇게 말하고 말아. 여행을 안 다녀 버릇해서 그런 거야. 한번 훌훌 털고 떠나 봐. 아니, 그냥 잘 모르겠고, 여행을 싫어한다니까? 집과 동네가 좋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찾는…… 그러면 아빠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고백을 하고 말아. 여행할 돈이 없어서 그래. 그때서야 맞은편 이모 삼촌은 내 입장을 이해해 주더구나. 여행갈 돈이 없었던 다소 게으른 청년의 한심함을 말이야. 돈이 없었던 게 아주 거짓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른 데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거참 고약하더구나.
* 일찍이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라는 에세이집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던 서효인 시인의 다른 저서이다. 이 책은 그가 첫째 딸 은재를 위해 쓴 글을 엮은 것으로, 위 글은 본문 30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는 위 글을 읽으며 구세주를 만난 양 환호했다. 동시에 내가 비정상이 아님을 인정받은 듯하여 안도했다. 나 역시도 여행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내 취향을 솔직하게 고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핑계와 구구절절한 변호를 동반해야만 했다.

  요즘의 우리나라는 어쩐지 ‘여행 권하는 사회’인 듯하다.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겠지만, 누군가는 낯선 곳에서 진이 빠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익숙한 곳에서 진부함을 느끼겠지만, 누군가는 익숙한 곳에서 소진된 에너지를 채울 수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이다. 취향을 두고는 논쟁할 수 없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분명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여행하지 않을 권리(혹은 여행을 싫어할 권리)’가 있다.

  



  자녀에게 많은 곳을 보여 주고자 하셨던 부모님의 가치관과 노력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국내외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여행을 권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내 스스로 떠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보니, (비용의 문제는 차치하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 비해 여행에 대한 욕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수많은 관심사 중 여행은 내 우선순위에 놓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간이 생기면 여행을 계획해서 떠나기보다는 집에서, 동네에서, 고향에서 늘어지게 쉬고 싶었다. 그 편이 내가 누리고 싶은 최상의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멋진 곳을 다녀온 지인에게 여행의 후일담을 별로 묻지 않는다. (크게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다.) 나에게는 ‘지금, 여기, 우리’ 얘기만 해도 할 말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는 지인에게도 잘 공감해 주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공감 능력이 전무한 듯하여 민망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1년 365일 언제나 집과 동네만을 오가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때그때 나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수급’하기 위해 익숙한 공간을 훌쩍 떠나기도 한다. 나만 해도 5월 황금연휴에는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냈던 그 친구와) 1박 2일로 전주를 다녀올 예정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 정도의 짧은 일탈이 필요하다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먹으라고 내 몸과 마음이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신호를 제대로 읽어 내는 일이다.

남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이 예찬하는 여행의 진정한 의미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집순이의 머나먼 외출이 시작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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