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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13. 2017

부치지 못한 편지

헤어진 그대에게 4

내 노트북 바탕 화면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폴더가 하나 있다.

이 폴더 안에는 어차피 부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쓴, 어찌 보면 시간 낭비의 결정체인 편지글이 몇 개 들어 있다. 부끄럽지만 몇몇 파일의 제목을 살짝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의 졸업식_K에게

공휴일과 공휴일 사이_B에게

아무 남자_K에게     

 

  어쩐지 현진건의 소설 B 사감과 러브레터에 등장해야 어울릴 법한 제목 같지 않은가? 이렇듯 통속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편지글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받는 사람이 모두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중에는 사귀었던 사람도 있고, 사귀지는 않았으나 썸을 탔던 사람도 있고, 나는 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던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식이든 나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놓은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와 감정적인 관계를 정리할 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미’ 끝난 사이에 이미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도, 끝난 마당에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다. 더 지질하고 별로인 모습으로 남을까 두려웠던 것도 같다. 그래서 좋게 좋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 같으면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상대방에게 쏟아 내고 싶었던 원망이나 비난 등은 속으로 삭였다.

* 타인으로부터 착한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말한다고 한다. 확실하게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나, 주변 사람들의 얘기와 자체적인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입안에서 난폭하게 맴돌던 말들도, 분통이 터질 것 같던 마음도 시간이 흐르자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진 듯 보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순간에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억이 연상되거나 비슷한 상처를 마주할 때면, 이따금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도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참았던 말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속 ‘멍울’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그 무게만큼 나를 짓누를 뿐이었다. 털어 내지 못한 말과 묵혀 둔 감정이 나를 할퀼 때마다, 나는 간헐적인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아팠다.

  그렇게 어둡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고 또 침잠할 무렵, 친한 선배가 글을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머릿속으로만 곱씹는 것과 그 생각을 밖으로 풀어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면서 말이다. (알고 보니 이 얘기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한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반신반의하면서도 ‘뒤늦은’ 편지를 써 보기로 결심했다. 나만의 비밀 폴더를 우체통 삼아 길게는 삼사 년, 짧게는 반년 전 ‘해묵은’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몰라서 모든 파일에는 암호를 걸어 놓았다.

  작심하고 편지를 쓰는데도 성격 때문인지 육두문자를 남발하지는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훨씬 더 독한 말을 수없이 내뱉었던 것 같은데, 막상 글로 표현하려고 보니 생각만큼 ‘지랄 맞게’ 쏟아 내어지지 않았다. 다만 ‘나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야’와 같은 자뻑, ‘나보다는 덜 행복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소심한 원망은 편지 곳곳에 담겨 있다. 볼 사람도 없는데 이 정도야, 뭐! 

  당시에 못다 한 말을 이제야 편지로 써 내려갔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쓰면서 참 많이 울었지만, 참 많이 후련했다. 나는 분명 상대방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래서 서운했고 슬펐었지, 아플 만했구나’ 싶어 내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치유받는 기분이었다.

홀로 삭이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었다.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감정의 멍울을 안고 있는 쪽이 상대방을 더 많이 좋아하고, 더 많이 기다리고, 더 많이 힘들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주변에 더 많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추측이 옳든 그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인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머리로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인연이 아니었다’는 한 문장으로 그간의 내 마음을 정리하기가 억울했던 것이다. 어쩐지 나에 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듯 보였던 상대방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편한 방식으로
그를 잊을 권리가 있다.

비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상대를 배려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더 구질구질하게 기억될까 봐 변변한 생떼조차 부려 보지 못하고 끝을 맺었는데, 그렇다면 이 정도 편지쯤은 써도 되지 않을까?

  그와 내가 만났다 헤어졌다. 우리 둘의 몫이었던 사랑이 끝났다. 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헤어짐은 각자의 몫이므로, 나는 내 몫만 감당하면 된다. 우리일 때 그만큼 했으면, 나일 때 이만큼 해도 된다.

  그냥, 그렇게, 나답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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