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Apr 06. 2017

나와 연애할 때

헤어진 그대에게 3

  이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연애 많이 해 본 애가 결혼 잘한다”는 말.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저 말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제멋대로 추측해 보고는, 꽤 그럴듯하다 느낄 때가 간혹 있다. 예컨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는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아니 드러날 이유가 없었던 나의 ‘밑바닥’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관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두려움과 불안함,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내 질투심과 지질함 등등……. 그제야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나 자신과 조우하게 되고,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다.

  나 역시 몇 번 안 되는 지난 연애들이 끝난 이후에야,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내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렇게 생겨 먹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요소란 무엇인지, 감당할 수 없는 요소란 무엇인지 체득해 나갔다.* 결국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만큼,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는 어쩌면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여담이지만 예전에는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나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경험치가 쌓이고,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이러이러한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의 부재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의 존재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은 아닐는지. 그렇게 우리는 점차 ‘소거법’으로 점철되는 인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첫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행복할 줄로 알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많이 표현하고 주고받는 연애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랬던 내가 너무나도 덤덤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 사랑의 무게가 더 깊었기 때문에, 3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는 담백하고 무던하게 연애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내가 건넨 마음의 크기를 그대로 돌려받고자 사랑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좋으면 그뿐이지’라고 생각하며 홀로 표현하고, 챙기고, 아끼는 연애가 지속되었다. 물론 상대방도 그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원래 이런 사람이 이 정도 했으면 노력한 거지’라고 나를 다독였다. 문제는 그 최선의 ‘기준’이 서로 간에 달라서 나에게 닿지 못한 데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견디는 게 나날이 버거웠다. 내가 좋아도 그뿐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낀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슬픈 가정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내가 건넨 마음의 100만 분의 1이라도 좋으니, 그 마음에 대한 성의의 표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노력해도 그 정도인 사람과는 행복할 수 없었다는 것을.




  칼럼니스트 임경선은 저서 《엄마와 연애할 때》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을 상대에게 퍼부었을 때 한 발짝도 뒷걸음질치지 않고 의심 없이 다 기쁘게 받아준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 죄다 무섭다고 도망갔으니까.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책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읽는 편인데도! 나 역시 저자와 비슷한 이유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지켜보았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는 마음 놓고 화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을 결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연애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는 ‘우리가 싸울지언정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말해도 된다’는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연애가 내게 남긴 일종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겠다. 나는 내가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에서 소심하게 내 감정을 토로했다가 이별 통보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면 누구든 떠나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하고 홀로 불안해한 적이 많았다.

  어쨌든 저자도 나도 떠나간 그들 덕분에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어쩌면 헤어진 그(혹은 그녀)들이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추억할 수 있는 ‘지나간 시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속에서 수없이 웃고 울었을, 그리하여 끝내 마주할 수 있었던 거짓 없고 진솔한 ‘나 자신’이 가장 큰 선물은 아닐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일은 없다.

그들을 사랑한 덕분에 나는 나다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사랑할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는 나에 대한 깊은 이해로, 혹은 내게 맞는 ‘사람 보는 눈’으로 이미 나에게 다가와 있다. 

  그러므로 헤어진 그대여, 당신은 이별한 그 시간 그 장소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 당신은 이미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