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자의 전설
2002년 여름을 기억하시는가.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온 나라를 붉게 휘감았던 그때 그 시절을.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이미 직감했던 것 같다. 이런 월드컵은 내 평생에 다시 없으리라는 것을.
2002년의 늦가을을 기억하시는가. 평소에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도,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했던 사람도 월드컵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을.
그랬던 어느 주말에 부모님께서는 나와 동생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날 내가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었던 홈 팀은 8회 말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상대 팀에게 3점 차이로 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기저기서 성난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마, 드가자!”
“이번에도 파이다! 치아라!”
역정을 내며 자리를 뜨는 관중들이 하나둘 늘어가자, 빽빽했던 관중석이 듬성듬성 빈 공간을 드러냈다. 그렇게 9회 말, 우리 팀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장발의 투수가 공을 던졌고, 우리 팀의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쭉쭉 날아갔다. 쓰리런 홈런이었다! 스코어는 9 대 9, 동점이 됐다. 경기의 분위기는 완전히 우리 팀으로 넘어온 듯했다.
곧이어 상대팀의 투수가 바뀌었고, 타석에는 안경을 낀 다음 타자가 등장했다. 투수가 공을 던졌고, 우리 팀의 타자가 배트를 휘둘렀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쭉쭉 날아갔다. 솔로 홈런이자 역전포였다!
야구는 9회 말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최종 스코어 10 대 9, 역전승이었다!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함성이 관중석을 맴돌다 하늘 위로 터져 나갔다. 나 역시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직감했던 것 같다. 내가 축구공보다 훨씬 작은 이 ‘야구공’ 하나 때문에 평생 울고 웃으리라는 것을. 또한 내가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 야구에서는 타자들이 연속으로 홈런을 치는 것을 ‘백투백 홈런’이라고 부른다. 내가 목도한 명장면이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를 끝내는 백투백 홈런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002년 11월 10일,
내 야구의 역사는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경기로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LG 트윈스를 상대로 6차전 만에 일구어 낸 결과였다.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기대하고 꿈꾸었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영광을 야구 직관에 익숙지 않은 ‘초심자’가 턱 하니 누려 버린 것이다. 8회 말에 야구장을 떠나셨던 그때 그 아저씨들은 뒤늦게 결과를 확인하고 얼마나 통탄하셨을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집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야구장에 자주 가지는 못했어도, 아버지가 야구 중계를 틀어 놓으신 날에는 옆에 앉아 관심 있게 쳐다보았던 것이. 수험생이 되면서는 야구 중계조차 못 보는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나는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라 자부했던 것 역시.
그동안 삼성 라이온즈는 내 응원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프로 야구의 최강자로 오랜 시간 군림해 왔다. 그러다 작년에는 10개 구단 중 9위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만 했다.
“웬일로 졌네?”라는 표현이 익숙했던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은 작년 한 해 “웬일로 이겼네?”라는 말에 익숙해져 버렸다. 여담이지만,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나쁘니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그 전까지는 성적이 좋으니까 응원하는 게 아니냐는 핀잔을 듣고는 했었는데, 요즘에는 내 ‘팬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삼성 라이온즈가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 성적의 부침을 겪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은 사라지고 새로이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개장했으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달라졌는데,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2002년에 기적 같은 쓰리런 홈런을 날려 주었던 그 타자가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로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올해는,
그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현역으로 활약하는 마지막 시즌이다.
나는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두 벌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전 디자인의 파란색 어웨이 유니폼, 다른 하나는 작년에 출시된 새 디자인의 흰색 홈 유니폼이다. 그런데 둘 중 어디에도 선수들의 등번호와 이름은 마킹되어 있지 않다. 이런 부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이성적이라, 팀은 그대로여도 선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등번호와 이름을 마킹한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된다면, 어쩐지 유니폼을 볼 때마다 슬프거나 허무할까 봐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는 한 유니폼에 ‘36’이라는 숫자를 꼭 새기려고 한다. 그것이 내 야구의 ‘시작’을 만들어 준 그 선수의 ‘마지막’에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서 말이다. 매일같이 야구장에 가서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으나, 매일같이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챙겨 보지도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항상 건투를 빌었던 ‘샤이’ 야구팬의 헌정이란 이렇듯 소심하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보람된 시즌이 되기를 이렇게 글로서나마 응원한다.
내일은
2017 KBO 프로 야구가 개막하는 날이다.
WBC에서의 부진 등으로 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은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개막 경기를 기다리고, 또 다른 유니폼(예를 들면 선데이 유니폼)을 구매할까 고민하고, (시범 경기의 성적이 꼴찌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푸른 사자의 전설을 고대하고 있다. 내 앞가림을 하면서 먹고살기에도 바쁜 나날에 이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서효인 시인의 에세이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의 제목을 빌려 왔다. 이 책은 OtvN에서 방영된 ‘비밀독서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해결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그 전부터 내 인생 최고의 에세이집 중 하나였다. 인생과 야구를 절묘하게 접목한 표현들이 참으로 맛깔스럽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읽어 보시길.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