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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23. 2017

날카로운 첫 이별의 추억

헤어진 그대에게 2

  그 날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를 만나게 해 주었던 학생회관 5층의 동아리방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이별하기 딱 좋은, 날씨마저 슬픈 날이었다.

  그 날도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라는 동네에서 우리는(나는 이곳에서,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또 한 번 헤어졌다. 이별하기 아까운, 날씨마저 청명한 날이었다.

  나의 첫 연애는,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2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 약 3년여의 시간을 함께했던 그와의 만남은, 예상치 못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첫 연애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와 그(혹은 그녀)가 헤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 자체가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은 유일한 시기였으니 말이다.

  “서로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다니, 말도 안 돼!”

  이렇게 확신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것이었구나!”

* 1995년도에 발표된 김명애 씨의 노래 ‘도로남’ 가사의 일부이다. 트로트에는 정말이지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




  나를 아껴 주던 당신이, 나를 가장 잘 아는 당신이, 그래서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아파할지도 아는 당신이 냉정하게 떠났다. 헤어진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들은 더 이상 나의 안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가족이나 친구 관계에서는 미처 겪어 보지 못한 감정적 충격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생긴다. 모두가 동일한 패턴을 겪은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는 아래의 다섯 단계를 수없이 오르내렸던 것 같다. 바야흐로 나만의 ‘이별 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1단계: 현실 부정
헤어진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진다. 조금만 기다리면 평소처럼 그에게 연락이 올 것만 같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질까 싶어 잠을 청한다. 꿈에서 본 우리의 모습은 헤어지기 전처럼 다정하다. 꿈에서 깨어 ‘아, 다행이다. 헤어진 게 꿈이었어’ 하는 순간 깨닫는다.
2단계: 현실 자각
이별이 현실이라는 것을.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난 순간부터 극도의 고통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듯하다. 자주 멍을 때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한다.
3단계: 과거 미화
분명 많이 다투고 싸웠었는데, 어째서 좋았던 기억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서로 사랑했던 시절이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뽀샵’되면서,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위험한 발상을 시작하게 된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문자를 보내고, 받지 않는 그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한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바야흐로 흑역사 생성의 시기이다.
그 당시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았으면 숫자 ‘1’이 사라졌는지 여부를 놓고 무수히 많은 밤을 울며 지새웠을 게 분명하다.
4단계: 과거 폄하
이제야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다. 좋았던 기억 말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참 많이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헤어질 만했으니까 헤어졌겠지’ 싶다. 뒤늦게 분노와 원망이 들끓기도 한다. 독하게 마음먹고 잊으리라 결심한다. 나는 너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 테니까!
5단계: 일시적 평온
온갖 감정놀음에 지쳐서일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진다. ‘우리는 딱 이 정도의 인연이었구나’ 싶다. 어쩐지 묵은 감정의 찌꺼기도 다 털어 낼 수 있을 듯하다. 마음속 평화가 이렇게만 지속되어 준다면, 실연을 극복하는 것쯤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혼자만의 마음속 사투 끝에 5단계에 이르렀는가.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별 열차’는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감정 롤러코스터’의 운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도 1단계부터 5단계까지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이 열차의 끝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조차도. 그래서 첫 이별이 가장 아픈 법이다. 이별이 올 수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별 후에 얼마나 어떻게 아플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5단계의 행복을 맛보았다면, 이제는 ‘시간’이라는 ‘안전바’에 몸을 맡겨 보자.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에 기댈 때가 왔다. 여전히 두렵고 무섭겠지만, 당신은 이미 모든 단계를 다 겪어 낸 ‘유경험자’가 아니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5단계에 머무는 순간은 틀림없이 길어질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괜찮아져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어도 좋다.

  오늘도 비가 내렸다. 몇 년 전 그렇게도 마음 아팠던 비 오는 날이 떠오른다. 비가 내리고, 그대는 흐르고, 그때는 지나서, 추억이 스친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있다.
**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 〈마음 한철〉이라는 작품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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