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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l 22. 2017

엄마라는 꿈

<쌈, 마이웨이>의 설희를 응원하며

  얼마 전 종영한 KBS 월화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마지막 4회분은 좀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박서준)가 주인공인데다가 그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이 드라마, 생각보다 마냥 코믹하고 가볍지만은 않았다.

  6월 말에 방영된 12회에서 주인공 커플의 친구이자, 또 다른 커플인 주만(안재홍)이와 설희(송하윤) 사이의 위기는 절정에 다다른다. 같은 회사 인턴에게 남자친구인 주만이가 흔들리는 것을 애써 모른 척 지켜봐 오던 설희가, 결국 이별을 고한 것이다. “난 너한테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후회도 없어. 후회는 네 몫이야.”라는 설희의 마지막 대사는, 여태까지의 내 연애사와 사랑관을 그대로 담아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방송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헤어지기 전에 친구인 애라(김지원)와 함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설희의 모습이었다. 주만이와 헤어지고 꿈을 찾아 나서라는 애라의 애정 어린 조언에, 설희는 자신이 여섯 살 때부터 품어 왔던 꿈에 대해 털어놓는다.

엄마, 내 꿈은 엄마야.
난 소꿉놀이해도 맨날 엄마였잖아.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게 내 꿈이라고.
그냥 주만이랑 결혼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엄마는 꿈으로 안 쳐줘?
세상 사람들은 꼭 자기 계발해야 돼?
니들 다 잘났고 자기 위해서 사는데, 나 하나 정도는 내 식구들 위해서 살아도 되는 거잖아.
그거 니들보다 하나도 못난 거 없잖아.
6월 27일 방영된 <쌈, 마이웨이> 12회 중에서

  머리가 띵 울리는 듯했다. 잊고 있었던 오래된 바람이 떠올랐다.

그랬다,
나에게도 엄마라는 꿈이 있었다.

  만약 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면, 나는 이미 결혼해 있어야 했다. 어쩌면 첫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물넷에서 스물여섯 사이에 결혼을 하고, 남편과 신혼 생활을 일이 년 정도 즐긴 다음, 스물여덟에서 스물아홉 사이에 첫 아이를 낳는 것.* 꽤나 구체적인, 그래서 일견 잔망스럽기도 한 이것이 내 인생 계획이었다.

* 돌이켜 보니 서른 전에 꼭 첫 아이를 낳으리라 다짐한 데에는 중학교 생물 선생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교에 막 부임하신 초임 교사이셨는데, 우리가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결혼하셨다. 그리고 졸업 후 고등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의 배는 이미 많이 불러 있었다. 엄마의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에게 좋은 유전자가 가기 때문에 일찍 임신하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에 박혔던 모양이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한두 살 더 적으셨을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로망’을 간직하고 있다.

만약 사랑에 관해서라면 어떤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지, 어떤 연애를 하고 싶은지, 더 나아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지, 어떤 결혼 생활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까지도.

  이러한 얘기는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언제나 재미있지만, 특히 대학 입시에 찌들어 있는 고등학생 때 나누기에 제격인 주제였다. 나 역시 친구들과 삼삼오오 무리 지어 서로의 로망을 공유하고는 했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많은 친구들은 남자친구와 이러이러한 데이트를 해 보고 싶다, 이런 선물을 받고 싶다 등등의 로망을 피력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남편이 퇴근할 때 ‘보글보글 찌개 소리로 반겨 주는 집’**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둥,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의 넥타이를 매 주고 싶다는 둥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행복이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대학에 가서 남자친구가 생기면 들입다 퍼 주다가 상처받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친구들의 눈은 크게 틀리지 않았던 듯싶다.

** 이승기의 ‘결혼해 줄래’ 노랫말에 있는 구절이다. 이 노래에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더 좋아해 / 남자와 여자 사이엔 그게 좋다고 하던데’라는 가사도 있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연애를 할 자신이 그닥 없기 때문에, 진리의 ‘케바케(case by case)’라는 말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한다. 나는 여전히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자취를 시작했는데, 일부러라도 이런저런 음식을 해 먹어 보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 ‘신부 수업’을 하는 셈 쳤던 것도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냥 나 스스로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요리하다 보면 결혼하고 나서 남편의 끼니 정도는 제대로 챙겨 먹일 수 있겠지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고서 화들짝 놀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러고는 이내 머릿속을 휘휘 저어 그 생각을 멀찌감치 밀어냈다. 마치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성 역할에 수긍하게 된 건지, 어쩌다 내가 이토록 가부장제에 물든 것인지 반성한 적도 많다.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종갓집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장손이셨던 터라 우리 집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멋도 모르고 떡을 만들고, 전을 부쳤다. 문제는 그게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도란도란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좋았다. 손이 야무지다며, 시집가도 잘하겠다는 할머니 세대의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받는 것도 좋았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은 부엌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이였다.

  만약 내가 남동생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면, 그래도 나는 지금처럼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많은 요소들은 과연 나의 취향과 성향만이 반영된 결과일까. 내가 설희와 같은 꿈을 꾸게 된 데에는 일정 부분 그렇게 키워졌기 때문은 아닐까. 수많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들었다. 답은 여전히 내리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 세대나 더 이전의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업에 있어서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다양한 측면에서 산재해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공부한 것을 살려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일과 가정 생활을 잘 병행하여 아내로서 엄마로서 잘 살아 보고 싶은 욕구가 들끓는데, 여기에 높은 가중치를 두면 어쩐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진취적인 것처럼 보이는 진로 고민은 쉽게 토로하면서도, 엄마라는 꿈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나 표현할 수 없었다. 한낱 남자 문제로 치부될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설희에게 고마웠다. 잊으려고 애썼던 꿈을, 꿈이라 말해도 된다고 용기를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종종 집밥을 대접하려 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전형적인 ‘여성성’을 구현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내 속에 그러한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것 또한 취향과 성향의 문제이다.

나는 여전히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사실 나에게는 다른 어떤 꿈보다도 이 꿈이 더 간절하다. 그래서 가끔씩 눈물겹게 슬프다. 내 노력만으로 이룰 수도, 나 혼자서만 꿀 수도 없는 꿈이니까 말이다. 다른 꿈들은 그래도 내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심지어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는 듯하다. 제 짝을 찾았거나 이미 결혼한 선배들은 때가 되면 인연이 온다며 기다리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이 기다림이 너무나도 막막하다.

  그러나 앞일을 알 수 없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두 가지뿐일 것이다. 선배들의 말을 믿으며 기다리거나, 선배들의 말을 믿지 않으며 비관적으로 살거나. 어차피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라면, 속는 셈 치고 믿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결론이다. 이효리도 JTBC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기다리면 와.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막 여기저기 눈 돌리면 없고, 내가 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니까 좋은 사람이 오더라. 자꾸 여행도 많이 다니고, 책도 많이 보고, 막 경험을 많이 쌓아서 어떤 게 좋은지 알아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딱 알아보지, 안 그러면 못 알아 봐.
7월 16일 방영된 <효리네 민박> 4회 중에서

  그냥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곳에서,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헤쳐 나가면서, 그렇게 기다릴밖에. 정말 인연이면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니까, 그냥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참고로 설희와 주만이는 마지막 회에 재결합했다. 주만이가 설희의 진짜 인연이었기를, 주만이와의 관계 속에서 설희가 오래된 꿈을 이루었기를 바란다.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설희에게 한껏 감정 이입한 채 설희의 꿈을 응원했다. 설희의 꿈은 곧 나의 꿈이기도 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설희가 불을 지핀 내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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