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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Feb 06. 2019

나에게는 5등 쪽지가 있다

재수생의 정신 승리법

오늘, 다시 책상을 정리했다.

후련하게 내다 버리고 싶었던 작년 공부의 흔적을 이리저리 정리하면서 올해의 공부를 준비한다.


11월 말에 있는 임용 1차 시험을 치고 나서,

모든 문제가 서술형+논술형인 시험의 특성상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임고생은 혹시 1차 시험에 합격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임용 2차 시험을 미리 준비한다.

(나 역시 그러했는데 그 이야기는 차후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12월 말에 결과가 발표되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1월 초에 임용 1차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고도 1월 말까지 남아 있던 사립 학교 시험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나는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1년 더 임용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짜의 기준으로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했다고 볼 수 있는 사립 학교 시험 이야기 역시 차후에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다시 책상을 정리하면서

내 앞에 놓인 현실을 한 뼘 더 가까이 마주해 본다. 




삼십 대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재수'라는 것을 해 보게 되면서,

지난 나의 학창시절과 이십 대를 되돌아보게 된 적이 많다.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재수'를 하지 않고 운 좋게 한 번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현역'이었다.

(요즘 고등학생들도 이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재수'라는 용어에 대응하여 이런 학생들을 '현역'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담이지만 임고판에서는 '초수'라는 표현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억울함(?)을 지니고 있듯이,

나 역시 수능에서 3년간의 모든 모의고사를 통틀어 최악이라면 최악인 성적을 받아들게 되었다.

(지금은 그나마 더 망치지 않은 것이 행운이며, 그 결과가 나의 실력임을 인정한 지 오래이다.)

대략 이십여 년간의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크게 맛 본 실패였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하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임고를 준비하면서도,

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대학 입시 과정에서 느꼈던 그 순간의 절망감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깊어진 아픔이 찾아올 것이다,

십 년 전에도 잘 이겨냈으니 이번에는 (나이도 더 먹었겠다) 그때보다 더 성숙하게 훌훌 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막연한 낙관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 입시와 임용고시의 결과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수능 성적 때문에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교의 국문과는 가지 못했지만,

그다음으로 가고 싶었던 대학교의 국문과 학생이 될 수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모교에서만큼은 입학 허가를 받은, 합격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용고시에는 차선이 없다.

그저 합격과 불합격만 있을 뿐이며, 나는 불합격자에 속했다.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간극이 주는 슬픔에다,

십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가져다 준 조급증에다,

진로를 바꾼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던(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욕심이

뒤범벅되면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학교를 운 좋게도 한 방(?)에 들어간 이후,

나름대로는 치열한 이십 대를 보냈다.

공백이 없었다는 게 치열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견학생 한 학기를 포함해서 휴학 없이 연속으로 9학기(4.5년)를 다녔고,

출판사 두 곳에서 대략 2년을 근무했으며,

출판사를 그만둔 이후 교육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반 년을 보냈고,

(그마저도 한국어교원에 관심이 많아 반 년간 한국어교원양성과정을 밟으며 보냈다)

교육대학원에서 연속으로 5학기(2.5년)를 공부했고,

지난 반 년간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이를 다 더하면 딱 십 년이란 시간이 나온다.


그래서 하루는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나름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왜 요 모양 요 꼴이지?'

'나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점수가 이 모양이지?'

싶은 것이다.


사실 부모님의 지원과 여러 지인들의 도움과 운때가 맞아 주었기에

공백 없는 지난 십 년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와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배 부른 고민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감히 억울하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내 스스로에게 한 번의 기회도 더 주지 못할 만큼 인색한 인간이였었나, 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아마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너무나도 미화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겠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3년 내내 나의 의지로,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잔 적이 없다.

(물론 쉬는 시간은 예외이다.)

졸았던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수업 시간이나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는 적어도 깨어 있으려고 발버둥쳤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던 적은 많았지만

적어도 잠과의 싸움에서 포기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게 내 자신과의 약속이었는지, 스스로를 지탱해 주는 자긍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런 성향은 십 년이 지난 작년까지도 남아 있어서,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온전히 집에 내려와 수험 생활을 한 반 년 동안

나는 마치 고등학생 때처럼(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물론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싶어서였겠지만

그 고민의 끝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도 겁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지금 이 시점의 감정 상태를 막연히 낙관했었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닌 듯하다.

어쩌면 나는 사회적으로 '실패'라 불릴 수 있는 그 어떤 결과들을 대면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그로 인해 발생할 공백이 겁이 나서,

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다그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은 내가 겁쟁이였기 때문에 나에게 한 번의 기회도 너그럽게 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러한 생각 역시도 시험에 떨어진 내가 하는 정신 승리인 것일까.)




설 연휴에 임용 1차가 끝난 직후 시작했던 JTBC 드라마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가 끝이 났다.

매 회마다 챙겨 보던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간 봤었던 드라마였는데 어제 방영된 마지막회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여주인공(길오솔 역, 김유정)이 건네준  '5등' 쪽지의 의미를 몰라,

남주인공(장선결 역, 윤균상)이 어린아이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그랬더니 어린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거 되게 좋은 건데? '한 번 더' 할 수 있는 거예요."라고.


그 순간

어째 그 어린아이의 대답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이 들린 것은 왜일까. 


그래,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1등'이 적힌 쪽지가 아니라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는 '5등' 쪽지인지도 모르겠다.

'5등' 쪽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너그러움과 여유로움,

'5등' 쪽지를 들고 있는 나에 대한 신뢰와 진정한 위로,

어쩌면 그게 재수 생활에 필요한 전부일지도.


그렇게 다시 한 번 책상 앞에 앉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다.

사실 너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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