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문법 교육 1: 보조 용언 '내다'에 관하여
요즘 동생에게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해 주고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국어 문법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해 주면서, 나 역시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워밍업을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형태론 영역을 다루다가 오랜만에 '본 용언'과 '보조 용언'의 개념을 마주하게 되었다.
'본 용언'과 '보조 용언'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둘의 상위 개념인 '용언(用言)'의 개념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용언'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단어 중 '동사'와 '형용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용언은 "어미를 취하여 활용을 하며, 문장에서 서술어로 쓰일" 수 있는데,* 대체로 하나의 용언이 서술어로 기능하지만 간혹 둘 이상의 용언이 결합하여 서술어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 ⟪한국어 문법 총론 1⟫의 175쪽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아래의 예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 보자.
(가) 여름철에는 음식물을 꼭 끓여 먹자.
(나) 야구공으로 유리를 깨 먹었다.
** 2017 서울시 사회복지직 9급의 문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가)에서는 '끓이다'와 '먹다', (나)에서는 '깨다'와 '먹다'라는 두 개의 동사가 결합하여 서술어를 이루고 있다. 이때 동사의 '먹다'가 '먹-+-자 → 먹자', '먹-+-었-+-다 → 먹었다'와 같이 그 형태가 변화하는 것을 '활용'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활용을 하는 과정에서 그 형태가 고정되어 있는 '먹-'과 같은 것을 '어간', 어간 뒤에 붙어 다양한 활용 양상을 일으키는 '-자'와 '-었-', '-다'와 같은 것들을 '어미'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끓이-+-어 → 끓여', '깨-+-어 → 깨'의 경우에도 '끓이-'와 '깨-'가 어간, '-어'가 어미로 구분된다.
다시 (가)와 (나)로 돌아와 보면, 두 문장에 공통적으로 '먹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각기 다른 어미가 결합하여 '먹자'와 '먹었다'와 같이 활용된 형태가 다를 뿐이다. (이때 '먹다'와 같은 꼴을 용언의 '기본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와 (나) 둘 다에서 '먹다'는 'eat'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 (가)의 '먹다'는 'eat'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나)의 '먹다'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모국어 화자이기 때문에, 이 차이를 직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때 (가)의 '먹다'를 '본 용언', (나)의 '먹다'를 '보조 용언'이라 한다. 즉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며 문장의 서술어로 기능하는 '본 용언'과 달리, '보조 용언'은 그 의미를 상실한 채 '본 용언'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시제 등과 같은 문법적인 의미를 더해 주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국어사전에서는 '보조 용언'의 이러한 역할도 다음과 같이 공표해 놓고 있으니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내다(우리가 원하는 '내다'는 '내다02'라는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다)'를 검색하면, 위와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한다! 보조 용언의 뜻풀이와 용례 등은 본 용언( [Ⅰ]「동사」)의 내용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겹게 보조 용언(보다 구체적으로는 보조 동사)으로서의 '내다'의 뜻풀이를 살펴보니, "주로 그 행동이 힘든 과정임을 보일 때 쓴다"고 되어 있다.
정말 그러한가?
잠시 생각에 잠겨 보자. 당신은 어떨 때 무의식적으로 보조 용언 '내다'를 사용한 것 같은가?
나는 보조 용언 '내다'의 미묘한 어감 차이를 인식했던 그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때는 2013년 연말, 첫 직장에 입사한 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직장인 신분으로 맞이한 첫 연말에, 나는 분명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글을 쓰며 "살아 내느라 고생 많았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어쩐지 '한 해를 보내느라' 혹은 그냥 '한 해를 사느라'와 같은 말로는, 그 당시의 내가 하고 싶었던 의미가 충분히 담기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내다'라는 보조 용언을 덧붙였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출근길이면 경미한 교통사고가 나서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기를, 회사 앞 정류장에 나를 데려다 주는 마을버스가 영화 <E.T>의 마지막 장면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매일 바라고 있었다. 이게 매일 아침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을 출근길마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부터 퇴사의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 무렵 이후로 나는 '살아 내다', '이겨 내다', '버텨 내다'와 같은 말을 유난히 자주 쓰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선배들의 나날도 혹여 그렇지 않을까 싶어 지인들에게 보내는 문자와 편지에도 보조 용언 '내다'를 남발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시 무의식적으로 보조 용언 '내다'를 사용하여, 그 말에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의탁한 것은 아닐지.
혹시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겨 내야지, 뭐'와 같은 말을 내뱉는 누군가를 만난 것은 아닌지.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는 결코 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므로 오늘도 곳곳에서 보조 용언 '내다'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누군가의 귀에서 귀로 떠다녔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을 마주하게 된다면 평소보다 조금은 따뜻하게, 너그럽게 그 말의 주인을 대해 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습관적으로 보조 용언 '내다'를 넣어서 현재의 내 상태를,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나에게 지금 이 시기가 분명 쉬운 시절은 아닌가 보다. 언젠가 이 시절을 웃으며 추억할 날이 올까.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도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서 주인공 다카시에게 부모님이 해 주셨던 말처럼,
"인생이란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리는 법이다"라는 말을 믿어 보기로 한다.
* 며칠 전 우연히 영화 채널을 돌리다, 제목을 보고서는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회사를 두 번씩이나 그만둔 나에게, 내가 나약한 게 아니며 사회 부적응자여서도 아니라는 강력한 위로를 선물해 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도 결국 지나가서 어떻게든 잘될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그 어떤 회사도 내 삶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 어떤 일도 나를 망가뜨리면서까지 할 가치는 없다.
살아 내기만 하면, 아니, 살아 있기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