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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04. 2019

모든 교사는 누군가의 교생 쌤이었다

나의 첫 제자들에게

  중등학교 교사 교원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사범대학이나 일반대학 교직이수과정, 혹은 나처럼 교육대학원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한 달간의 교생 실습 기간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미 재작년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나 역시 교육대학원 3학기에 한 중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한 달간의 교생 실습을 함께했던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오늘 공식적으로 고등학생이 된다.

  임용을 한 번에 붙고 싶었던 이유야 수십 개가 넘게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이 학생들을 당당하게 찾아가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담당 교생으로 있었던 2학년 3반 학생들이 저마다 다른 고등학교로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그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교생 실습 기간이 끝난 지 1년 반이 넘도록 때때로 연락을 해 오는 한 친구에게는, 임용 시험에 꼭 붙어서 너희들이 졸업하기 전에 찾아가겠다는 약속까지 해 놓았던 터였다. 그런데 내가 임용 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2월 말까지도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꿈과 희망을 안고 자라나야만 할 것 같은 아이들에게) 실패한 모습을 보일 자신이 없었다.

 



  편집자 생활을 청산하고 나름대로 많은 고민 끝에 새로운 진로를 결정했지만, 그 고민이 무색할 만큼 나는 교육대학원 생활에 만족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든 간에 결국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했기에, 나는 교생 실습 기간을 앞두고 상당한 불안감을 겪어야 했다. '교생 실습을 나갔는데 만약 내가 교사라는 직업과 맞지 않는 걸 깨닫게 된다면?'이라는 최악의 가정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번뇌(?)를 안고 시작한 교생 실습에서 나는 임용 시험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나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나에게 너무 많이 배정된 수업 시수의 압박이나, 사다리타기로 걸려 버린 대표 수업의 부담감 등등 결코 쉽지 않았던 일련의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 아이들 덕분이었다.

  기본적으로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이 아닌, '교생 쌤'을 호의적으로 대해 준다. 수업 시간에도 '교생 쌤'의 수업이라고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려고 하고, 수업 외 시간에도 관심을 보이며 먼저 다가와 주려고 한다. 그렇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모든 교생이 좋은 추억만을 가지고 교생 실습을 마치지는 못하리라.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중요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교사의 길을 걸을 것인가, 걷지 않을 것인가 하는.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내가 담당 교생으로 있었던 2학년 3반 학생들도, 대표 수업을 함께했던 2학년 2반 학생들도, 더 넓게는 수업을 들어갔던 2학년 1반부터 5반까지 다섯 반의 학생들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길을 걸어 나가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머리를 굴려 결정했던 나의 새로운 진로가, 내 몸에도 맞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다행스러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은 아예 직업 자체를 바꾸기로 결심한 나에게 있어 결코 적지 않은 위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가져온 몇몇 순간들이 나에게도 있다. 그중에서도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는 찰나의 순간을 고백하고 싶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의 모든 20대를 학교 근처에서 살면서 보냈다. 그래서 대학교의 축제 기간과 같은 큰 행사가 벌어질 때에는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서도 그런 분위기에 함께 젖어들고는 했다. 대학생일 때는 마냥 그 순간이 즐겁고 신나기만 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몇 살이나 더 많다고 아주 어른이 된 것 마냥) '대학생들은 좋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축제 기간인 5월이 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축제의 중심에 있었던 대학교 시절을 회상하고는 했다. 나는 그 시기마다 때때로 '과거'에 살고 있었다.

  교생 실습 도중이던 재작년에도 어김없이 축제의 기간은 돌아왔다. 그때는 교생 실습을 시작한 지 약 2-3주 가량이 지나 있어서, 학생 한 명 한 명의 성향이나 특징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한 다음, 저녁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가기 위해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어느 동아리(혹은 어느 학과 학생회였는지도)가 축제 행사를 위해 부스를 설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우리 ##이*가 대학 가면 동아리 회장 같은 거 엄청 잘할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축제 기간에 '과거'를 살지 않고 '미래'를 그려 본 것은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너무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렇다면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찰나와도 같았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간이었다.

* ##이는 수업 시간이면 수업을 듣기보다 항상 엎드려서 책상에 만화를 그리던 학생이었다. 성격이 활발하고 워낙 사람들의 중심에서 빛을 발하는 친구라, 대학교에 가면 애니메이션 동아리를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것 같다.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지금도 여전히 생동하고 있기를.




  때때로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며 공상에 잠길 때가 있다.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조금 늦어도 괜찮다, 돌아와도 괜찮다, 그건 실패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담임을 맡게 될 (것이 분명한) 내 인생을 예로 들면서 '봐라, 나도 이렇게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그래서 결국 너희를 만날 수 있지 않았니?'와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학업 성적이 (여전히) 너무나도 중시되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속에서, 그 성적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모든 시험이라는 건, 잘 치는 사람보다 못 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합격자보다 불합격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니까 말이다.

  그러다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저 생각대로라면 임용 시험에 떨어진 나 역시도 '실패'한 것이 아닐 텐데, 왜 나는 나부터도 이런 결과를 부끄러워하면서 학생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는가, 하는.

  나는 내가 가르친(그리고 앞으로 가르칠) 학생들을, 그들의 성적만 가지고 누구는 가르친 것이 자랑스럽고 누구는 가르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 역시 내가 임용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지금의 이 불합격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인생의 한 과정일 뿐임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어야, 나중에 그 아이들도 그런 순간을 조금은 덜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누면서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나의 삶과 아이들의 삶을 너무 단순하게 동일시한 편협한 생각일까. 어쩌면 임용 시험에 떨어진 나를 학생들에게 포장하기 위한 합리화의 일환일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래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학교에서 고등학생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학생 두 명(교생 실습 기간 이후에도 연락을 가장 오래 주고받았던, 그래서 그나마 연락을 하기가 덜 멋쩍었던)에게 어제 연락을 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다 말했다. 내가 임용 시험에 떨어져서 일 년 더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래서 너희를 보러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도, 그럼에도 너희의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을 축하한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는 것까지. 무엇보다 너희들 덕분에 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어졌다고, 그러니 너희들은 이미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소중한 존재인 만큼 그걸 잊지 말라고, 너희와 다시 만나기 위해 나도 함께 달리고 있겠다고.

  그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자신만의 보폭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외국어고등학교에, 한 명은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아이들은 나에게 임용 시험에 꼭 합격할 거라는 응원의 말까지 건네 주었다. 심지어 한 친구는 자기가 나의 학생이었을 때 너무 행복했다며, 제자가 하기엔 이상한 말일 수 있겠지만 내가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한 학생의 학교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내가 자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나를 '쌤'이라고 불렀다. 자기를 나의 '제자'라고 불렀다.

  진짜 선생님이 아닌 교생으로 아이들을 만났기 때문에 감히 '제자'라는 말을 붙이지를 못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아, 나도 제자가 있었구나. 나 정말 누군가에게는 쌤이었구나.

  내가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다가 도리어 더 큰 용기를 선물받은 오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이 너무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나의 교생 실습을 함께해 주었던 그때 그 아이들 모두에게, 오늘 새 학교를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건강하게 빛날 그들의 긴긴 인생을 위한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는 첫 제자인 이 아이들의 고 2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그리고 첫 학교에서 담임으로서 반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3월을 맞이하고 싶다.

  너무너무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진짜, 너무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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