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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13. 2019

너는 미치지 않았다

서관 앞 목련에게

우리는 너를 '미친 목련'이라 불렀다.

라디에이터가 창가 쪽에 놓여 있는 강의실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네가 붙어 있는 바람에,

실은 봄이 온 게 아닌데 봄이 온 줄 알고 남들보다 이르게 꽃을 피우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했다.

너의 이른 개화가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선배들도, 우리도 너를 '미친 목련'이라 불렀다.


네가 내려다보이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을 때면

교수님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서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 들어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던 적이 많다.

밖으로 나가 햇볕을 쐬면 딱 좋겠다 싶은,

그런 봄날에 너는 우리와 함께했으니까.


그런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신 듯,

몇몇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며 이렇게 좋은 날 왜 결석자가 없냐고 농을 하셨다.

이런 날엔 나가서 놀아야지, 하시며

교수님 당신의 대학 시절이 어떠했는지 우리에게 들려 주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아, 정말 좋은 과에 입학했구나,

아, 정말 좋은 교수님들께 배우고 있구나,

아, 나는 이런 계절의 변화에 마음이 동(動)해도 되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기뻐했었다.

물론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는 교수님들처럼 수업을 툭 하면 째는 것과 같은 무용담이 가능했던 시절에 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적어도 스물 한두 살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의 장면 속에는 대체로 네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졸업하게 되었을 때,

국어국문학과 학생들만 모아 놓고 졸업식을 수여하는 행사에서

학과장을 맡고 계셨던 한 교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는 마세요."

누군가에게는 그 말이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동화 같은 축사로 들렸겠지만

나는 그때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내가 정말 좋은 과에서 좋은 교수님들과 좋은 시절을 보냈음을.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임을.


그리고 나에게는 교수님의 그 말이,

어쩐지 너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너는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

너는 언젠가 우리에게 있어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플라타너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학교에 남아 있는 지인들을 통해

예전보다 더 깊숙한 얘기들이, 그리하여 덜 아름다운 얘기들이 많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올해도,

나보다 열 학번 차이가 나는 후배들의 새내기 시절의 봄을 축하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잰걸음으로 서둘러 꽃을 피울 준비에 분주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꽃을 피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아름답지 않은 얘기들과 상관없이 너만은 여전하기를.


오늘 오랜만의 외출에서 목련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있음을 마주한 그 순간

너를 떠올린 나처럼,

아마 적지 않은 우리가 한동안 너를 추억하지 않을까 싶다.

너는 우리에게 있어 봄의 전령이자,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오르게 하는 청춘의 전령이었다.


그러니 너는 미친 것이 아니다.

노련하지 못하고 서툴렀으며

진중하지 못해서 성급했던 우리처럼,

너는 딱 그만큼 이르게 꽃을 피웠을 뿐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봄을 알려주는 일을 매년 반복하면서

너는 기어코 너만의 개화 주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올 봄에는 너를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는 나 역시도,

내 속도로 꾸준히 걸어간 끝에 마주한 내년 봄에는

다시 너와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녕, 미친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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