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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23. 2019

하얀 거짓말

이기적 요양 일기 1

  매주마다 한 번씩 할머니댁에 오고 있다. 1월 말에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빠짐없이 계속되고 있는 일상이다. 공부를 한답시고 할머니를 드문드문 뵈러 왔었던 중고등학생 시절 이후, 이런 적이 또 언제였나 싶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던 시기에 팔순 잔치를 하셨으니, 지금 할머니는 아흔이 훌쩍 넘은 연세로 살아가고 계시니까. 그런데 나는 놀랐던 것이다. 분명 할머니는 하루하루 더 늙어가고 계셨는데, 나는 그냥 할머니가 언제나처럼 (늙으신 모습 그대로) 계셔 주시리라 믿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이제야 내 근거 없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버지는 할머니댁에서 출퇴근을 하시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과 함께 우리집에서 출퇴근을 하신 지 몇 달이 넘어간다. 아버지의 근무 시간 동안에는 요양사 분들이 교대로 와 주시고(가족이 이런 일을 겪고서야 새삼 복지의 혜택(?)이 어떤 것이 있는지,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는지 깨닫는다), 퇴근 이후에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보신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드릴 것이 없다고 했고,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일상이 새롭게 재편되었다. 얼마전 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약을 더 받기 위해 대학병원에 찾아가자, 할머니를 담당하셨던 의사가 놀랐다고 하셨다. 약을 조금만 더 주려고 하는 것을, 아버지가 나중에 버리더라도 일단 많이 달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우리 가족 중 아버지의 일상이 가장 많이, 아니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정년 퇴직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계신 아버지는, 원래도 퇴직을 하고 할머니 곁으로 와 농사를 지으며 살 계획이셨다. 그런데 그 계획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몇 달 당겨지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괜찮다고 말씀하시지만 출근 전 목욕탕에 들러 피로를 푸셨던 것도, 종종 지인들과 운동을 하러 다니셨던 것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셨다.

  그래서 할머니를 뵙고 싶은 마음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잠깐이나마 자유 시간을 드리기 위해 주말이라도 꼬박꼬박 오려고 했던 것도 있다. 나와 동생이 할머니 곁을 너덧 시간이라도 지키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친구를 만나시든 스크린 골프를 한 판 치러 가시든 할 수 있었다.


  2월 초에는 할머니가 오줌 싸신 바지를 빨며 숨죽여 울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신 직후의 할머니는, 정말 기력이 없으셨고 당연한 말이지만 대소변을 혼자 가리실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처음 부딪혀 본 나는 속으로 당황스런 마음이 역력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할머니의 바지를 갈아 입히고 젖은 옷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마를 수가 있구나, 싶었다. 원래도 마르신 분이었지만 정말 그렇게나 마른 할머니의 몸을 보고 늙음이란 게, 죽음이란 게 충격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이런 상황에 심히 부끄러워하지도, 혹은 화를 내지도 않으셨다. 그냥 어이쿠야, 쌌다 하시면서 넘기셨다. 차라리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서러웠다.

  어릴 땐 할머니가 내 기저귀를 수없이 갈고, 옷을 갈아 입혀 주셨는데 지금은 우리 할머니가 때때로 기저귀를 차고 계시고, 아주 가끔 내가 할머니의 용변을 도와드린다. 30년이다, 이런 교대의 시기가 도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길다면 길고, 또 어찌 보면 짧은 것도 같은 그런.




  가정사가 없는 집안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우리집 역시 할머니의 인생을 떠올리면 사연이 많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라고 어른들은 흔히 말씀하시지만, 아직 어른 따위 되지 못한 나는 그런 말 한마디로 할머니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썩 내켜 하지 않으시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때때로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시집살이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그 속에 응어리져 있는 감정을 푸시게끔 유도한 적이 많다. 할머니는 최근 몇 년 사이에야 때때로 그 시절의 당신께서 참 불쌍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할머니는 아마 용납하지 못하시겠지만, 나는 요 근래 들어 내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할머니 앞에서는 농담으로라도 꺼내질 못하겠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하신 이후,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의 인생에 아쉬운 것은 하나도 없으나 딱 하나, 손녀가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게 한이라고 말씀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되받아 치는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그렇게 곱게 키워 놓고, 내가 시집 가서 할머니처럼 그렇게 고생하고 일만 하고 그랬으면 좋겠냐고. 그러면 요즘은 그런 시집 없을 텐데, 하시면서도 내가 그런 고생 하는 것은 싫다고 말씀하신다. 때로는 이렇게 되받아 치기도 한다. 할머니가 3년만 더 살면 결혼하는 모습 보여 드리겠다고. 지금 현재 상태로는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면서도, 그 말로 인해 할머니의 마음이 놓이고 할머니에게 생의 의지가 생길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지난주에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셨다. 그럼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고 싶어?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 고달팠을 삶을 알기에) 부잣집 딸로 태어나고 싶어? 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나에게, 할머니는 좋은 남편 자리 있는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대답을 하셨다. 자상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이런 순간에도 소박하다면 너무나도 소박한 바람을 표현하는 우리 할머니가 너무나도 인간적이라 애틋하다가, 이런 바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니 이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렸다. 나의 할아버지는 평생을 밖으로 떠도신 분이었고, 무엇보다 할머니에게는 너무나도 나쁜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생'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인간인 나는, 또 한 번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내가 남편으로 태어나서 잘해 주겠다고.

 



  나이 서른에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자니, 요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누군가 자식을 서울로 보내서 공부시켜 봤자 별 소용 없네, 이런 말을 부모님께 하는 것은 아닌지, 부모님조차 사실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그런 치졸한 상념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객관적으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아 왔고, 그렇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닐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도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부모님을 뵐 때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그런 압박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할머니에게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최고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확신을 가질 만큼 할머니는 끊임없이 내가 최고라고, 나만 한 손녀가 없다고 표현해 주셨다. 그래서일까, 요즘 같은 시기에 나는 (내가 아직 학교를 다니고 계신지, 회사를 다니다 왔는지, 지금 뭘하고 계시는지 매번 까먹고 기억하지 못하시는) 할머니 앞에서만 오롯이 '나'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내 이름 앞에 직업과 직위를 붙이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은, 불완전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내가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14회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엄마(장난희 역, 고두심 분)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딸(박완 역, 고현정 분)이 자신의 뺨을 때리며 내레이션하는 장면이.

엄마의 암소식을 처음으로 영원 이모에게 전해들으며, 그때 난 분명히 내 이기심을 보았다.
암 걸린 엄마 걱정은 나중이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사나 
그리고 연하는 어쩌나... 
난 오직 내 걱정 뿐이었다. 

그러니까 장난희 딸 나, 박완은
그러니까 우리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리 다 너무나 염치 없으므로. 


  그러니까 나 역시 할머니의 힘들었던 삶의 마지막 무렵에 그 어떤 것도 함께해 드리지 못한다는, 인간은 정말 단독자라는 생각에서 밀려오는 슬픔과 안타까움만으로 때때로 울며 잠드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사실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내가, 할머니가 없이 살아가야 할 내가 상상이 되지 않아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래도 할 도리를 했다며, 자기 위안을 하기 위해 매주 이렇게 할머니 댁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주 중에는 집에서 어떻게든 공부를 해 보려고 책상에 앉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즐겨 말씀하시는 몇몇 레퍼토리가 나중에 그리워질까 봐 녹음을 해 두는 것이다. 녹음을 해 놓고 다행이라며 안도했다가, 녹음을 하는 내 모습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를 대비하는 것 같아 괜히 부정 탈까 무섭고,

  할머니를 보러 와야겠다고 주말이면 준비를 하다가도, 할머니를 뵙고 돌아온 이후에 며칠 간 그 잔상에 남아 울먹일 내 모습이 미리 걱정이고, 고작 며칠이라는 것에 다시 한 번 자괴감이 들고,

  많은 시간을 주무시는 할머니 옆에서 공부를 해 보려고 책을 들고 왔다가, 할머니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을 깨닫고 책을 들고 오지 않았다가, 그렇다면 글이라도 쓰자 싶어 노트북을 들고 오는 내가 웃기기 그지없고,

  이런저런 쓰고 싶은 글이 참 많았는데, 주말이 지나고 나면 다른 류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의욕도 열의도 없어지고 그런 요즘이다.


  오늘도 내 눈앞에 할머니가 잠꼬대를 하며 낮잠을 자고 계신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이 순간이 조금만 더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기적이므로, 아직 내가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마지막까지 이렇게 떼를 써 본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연재를 염두에 둔) '1'이라는 번호를 붙일 것이다. 연재는 계속되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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