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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31. 2019

부은 손을 보다가

이기적 요양 일지 2

  일주일 사이 할머니가 많이 야위셨다.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로 오히려 식욕이 돌아오셔서 음식을 잘 드셨는데, 지난주 이후 음식을 잘 드시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링거도 한 번 맞으셨다고 들었는데, 오늘 뵈니 그 때문인지 손발이 많이 부어 있다.

  할머니를 뵈러 올 때마다 할머니 앞에서는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몇 번씩 되뇌고 오는데도 갈수록 차오르는 눈물을 통제하기가 힘든다. 몇 달간 나름 익숙해졌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한 뼘은 더 말라 버린 또 다른 낯선 모습에, 오늘은 인사를 하는 그 순간부터 참기가 힘들었다. 결국 화장실에 가서 눈을 꾹꾹 누르며 감정을 다스리다 나왔다. 다행히 할머니는 예전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지 않으시기에 충혈된 내 눈을 알아차리지 못하신다.

  외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께서 대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기에, 그렇기에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할머니가 되고 보니 내가 누군가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별한다는 것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별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1주 간격으로 마주하고 있기에 그 충격이 더 큰 것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이렇게 무섭고 허무하며 서러운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리의 무게가 피부에 서늘하게 와닿으면서, 그 소름 돋는 감촉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 삶의 일부를 덜어 내어 할머니의 삶에 붙여 드릴 수도 없고, 숨쉴 때마다 쌕쌕 이상한 소리가 딸려오는 할머니의 다 낡아버린 폐의 힘듦을 내가 나눌 수도 없다. 대체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어떻게 이러한 인생을 '소풍'에 비유하며, 그렇게 초연하게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표현을 하실 수 있었을까.



  

  오로지 할머니의 손발만이 여태껏 내가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뽀얗고 깨끗하다. 몸이 편찮아지시면서 그렇게 평생을 달고 사셨던 밭일을 완전히 접으시고 방 안에만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나 뽀얗고 깨끗할 수 있었던 것을 싶어, 나는 또 괜히 울컥한다.

  지난주부터 그런 할머니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다가, 문득 내가 어릴 때 썼던 글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국문학과에 진학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백일장에 나가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였지만, 백일장에서 장원(이 명칭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있어 보였고, 그래서 동경의 대상이었다)을 하기란 쉽지 않았고, 자잘자잘한(돌이켜보면 결코 작지 않은 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들을 수집(?)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장원의 영광을 안겨 준 백일장의 주제가 '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듯이, 내가 쓴 글의 대상은 바로 할머니의 손이었다. 오랜만에 그 글을 찾아 다시 읽어 봤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부모님 두 분 다 직장 일을 하셨기 때문에 어린 나를 돌보실 수가 없어, 나는 할머니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 댁은 농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 댁에서 자랐던 것은 참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자연과 어울리고 함께할 기회가 적은 지금, 나는 그 어린 시절이나마 흙과, 풀과, 나무들과 함께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연과 더불어 내 옆에는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내 어린시절은 더욱 아름답고 즐거웠다.
   할머니와 함께한 나의 하루 일과는 언제나 할머니와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이 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나보다 항상 일찍 일어나시는 할머니가 아침밥을 준비해 놓으셔서, 맛있게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는 빗과 머리 방울을 들고 오셔서 나의 머리를 묶어 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할머니의 손길은 잊혀지지가 않을 만큼, 할머니는 항상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머리를 매만지시고는 이쁜 머리를 만들어 내곤 하셨다. 어제는 두 갈래 머리, 오늘은 땋은 머리, 이렇게 가지각색의 머리를 손으로 묶어 주셨다. 그러고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타박타박 걸어가고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도 할머니 손을 꼬옥 잡고 돌아왔다. 그리고 또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우리 할머니의 손맛이다. 양념 넣고 요리조리 비비고 주물러서 완성되는 음식의 맛은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뽀글뽀글 끓인 된장찌개, 할머니가 싸 주시는 콩잎 쌈, 할머니가 반죽을 만드셔서 직접 해 주시는 칼국수 모두 나에겐 잊을 수 없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맛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점점 날이 지나갈수록 할머니께서는 점점 몸이 편찮아지고 계신다. 그래서 이제 힘든 밭일은 그만하시라고 해도 할머니는 매년마다 밭을 일구시고 일을 하신다. 몸이 아프셔도 항상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오기를, 손녀인 내가 오기를 바라시고, 우리 가족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해 주시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신다. 그게 우리 할머니의 마음인가 보다.
   어제는 제사여서 학교를 마치고 바로 할머니 댁에 갔는데 문득 할머니와 마주 앉아 떡을 빚다 보니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어릴 때는 건강하고 맨들맨들했던 할머니 손이였는데 지금 할머니 손은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가득하고 밭일로 많이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찡하게 아려왔다. 나를 키우신다고, 이리저리 일하신다고 할머니 손이 변하신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 문득 내 손을 바라보니 할머니와 손을 맞잡고 걸어가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지금 내 손이 이렇게 곱게 자랄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주름진 손 덕택이었던 것이다. 다음 주에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의 세월 담긴 손을 꼬옥 잡고 이렇게 말씀드려야겠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 사세요. 제가 할머니 손을 오래 잡을 수 있게요.” 라고 말이다.

  



  열다섯 살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까지 내 인생의 전부였던 15년이란 삶을 꼬박 한 번 더 살고 난 이후에도 할머니는 내 옆에 계셨지만, 열다섯 살의 중학생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나는 할머니가 언제까지나 내 옆에 계셔 주실 걸로 믿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익숙함에 속아 고등학생 때는 매일같이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고 주말에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답시고 몇 주에 한 번씩 할머니댁을 찾았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게 힘들다며 몇 달에 한 번씩 할머니댁을 찾았고, 직장인이 된 다음에는 명절이나 여름 휴가 기간 에나 겨우 할머니댁을 들렀다는 것을. 그래 놓고는 임고 재수생이 되어서야,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편찮으시다니까, 다시 저 글을 썼던 때만큼 매주 할머니를 찾아뵙고 있다는 것을.

  열다섯 살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네가 서른이 될 때까지도 '공부'라는 걸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고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을. 대체 무엇을 공부해 온 것일까. 그래 놓고 나는 왜 주 중이면 또다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라는 걸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열다섯 살의 내가 할머니에게는 더 좋은 손녀였을 것만 같아, 할머니의 부은 손을 보며 나는 또 서러워한다. 내가 한 모든 공부는 쓸모가 없어서, 나는 서러워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채 오늘도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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