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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l 14. 2019

나에게도 무줄을

애도 일기 2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백 일이 훌쩍 넘은 것 같다. 그동안 할머니는 세 번 정도 내 꿈에 찾아오셨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유로, 할머니가 꿈에서라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너는 나에게 정말 좋은 손녀였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길 바랐다. 그런데 세 번 모두 나는 눈앞에서 할머니의 또 한 번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또는 그때처럼 너무나 야위어 있는 할머니를 안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이 내 감정의 진폭을 유독 더 크게 만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싶다. 나는 한순간 나의 할머니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그 허망함과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음에도, 한참이나 남은 내 시험에 대한 염려를 온전히 떨쳐 내지 못했던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그렇게 온화할 수가 없었다. 어떠한 아픔도 고통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평온한 미소마저 띠고 계신 듯했다. 아빠는 장례식장에 연락을 하시고, 엄마는 영정 사진과 수의 등을 챙기러 가시고, 나 홀로 남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렇게나 살갗이 따뜻한데, 이렇게나 머리카락은 부드러운데 할머니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할머니, 진짜 갔어? 진짜 갔어?" 하는 말만을 되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바보 천치가 되어 이미 떠나버린 할머니의 육신만을 지키고 있었다.

   곧 소식을 들으신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셨다. 옆집 할머니가 서럽게 우시다가 나를 안아 주셨다.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 자라며 나 역시 자주 뵙고 자란 분이었지만, 그 분의 품에 안긴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공부한다고, 일한다고 멀리 떠나 있었던 손녀보다 할머니의 일생 내내 옆을 지켜 주신 분들이셨다. 엄마는 옆집 할머니께 우리 할머니를 시시때때로 챙겨 주시고 살펴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평생을 사셨던 그 집을, 그 동네를 떠나셨다.




   부모님이 장례식 일정과 진행 과정 등을 장례식장 직원 분과 논의하실 때, 나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고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돈을 벌지도 않는 내가, 그렇다고 그런 절차에 익숙하지도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보며 환히 웃어 주던 할머니의 얼굴과는 달리 익숙하지 않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앉아 계신 무표정의 할머니를 바라보며, 그 사진이 할머니의 실물에 훨씬 미치지 못함에 서글퍼했다. 이렇듯 사소한 이유조차 그때의 나에게는 슬퍼할 모든 이유가 되었다. 영정 사진 속 할머니가 입고 계신 한복이 팔순 잔치 때 맞추신 옷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들었다. 할머니의 팔순 잔치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2월이었는데, 그럼 그때 할머니는 지금보다 얼마나 젊으셨던 것일까 생각하니 아득했다. 그리고 그 팔순 잔치 이후로 나는 경주에서 포항까지 통학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공부하기 바쁘다는 이유로 급속도로 할머니에게서 멀어졌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상되는 모든 생각조차도 나에겐 후회할 것들밖에 없었다.

   장례식장 직원 분이 상을 치를 가족들 이름을 물어보셨다. 손자, 손녀를 적는 순서에 이르러 엄마 아빠가 무슨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보니 직원 분께서 손자, 손녀순으로 이름을 적으려고 하시니 엄마 아빠가 손녀를 먼저 적어 달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소리였다. 직원 분께서 기재하는 순서만 이런 것이고 안내판에는 손녀 이름이 먼저 나오도록 조정해 주시겠다고 하신 이후에야 대화는 일단락됐다. 엄마 아빠도 내가 할머니의 상을 치를 때만큼은 절대 이러한 문제에 있어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와 남동생이 대학생이던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정상 나는 상을 치르는 중간에 내려와서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남동생은 바로 내려와 있다가 상을 치르는 중간에 올라가야 했었다. 그때 장례식장에서 할머니댁으로 올 때도, 할머니댁에서 선산으로 갈 때에도 누군가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어야 했는데, 당연하게도 나는 그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적이 있다. 남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던 사촌 남동생이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었던 것이다. 좀 의아했지만, 일평생 할머니를 이곳에 홀로 남겨 두신 할아버지가 마지막 인사를 여기서 하는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별다른 말을 해 봤자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만큼은, 그때처럼 또 역시 내가 영정 사진을 들지는 못할 걸 알았지만, 가능한 모든 것을 남동생과 사촌 남동생들과 동일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고 있는 나의 오기였다. 또한 손자 손녀 구분 없이 키워주신 할머니였지만 당신께서 죽으면 제사 지내 줄 거냐는 농담 섞인 부탁만큼은 남동생에게만 하셨던 우리 할머니에게, 왜 나에게는 그런 말씀 안 하시냐고 시집 안 가고 할머니 제사를 내가 지내겠다고 수차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던 나의 욕심이었다. 사실 할머니를 진정 위하는 길이란, 할머니가 어떤 걸 바라실지 생각하고 그에 맞게 모든 일을 순탄히 처리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할머니의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껄이는 나에게 할머니가 보내 주셨던 수많은 웃음을 믿기로 했다. 내가 손녀로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첫 손주라는 권리(?)를 내세우고 싶어한다면 할머니는 '당연히 그래도 되지'라며 웃어 주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 식대로 할머니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오기가 발현될 순간은 금방 찾아왔다. 할머니의 장례를 맡아 주게 되신 장례 지도사 선생님께서 가족들을 위한 상복과 완장 등을 챙겨 오셨다. 그 완장에는 두 줄짜리, 한 줄짜리, 그리고 줄이 없는 것이 있다. 줄이 없는 그 완장을 흔히  없을 '무' 자를 써서인지 '무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장례 지도사 선생님께서는 각각의 완장을 누가 둘러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면서, 무줄 완장은 손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차면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제야 왜 무줄 완장을 하나만 가지고 오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과연 내 앞으로 배당된(?) 흰 리본이 달린 실핀 하나만을 머리에 꽂을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도 무줄을 찰 권리를 달라고 요구할 것인가 하는. 그리고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꼭 무줄을 손자만 둘러야 하냐고, 저도 두르면 안 되냐고 묻는 내 말에 장례 지도사 선생님께서는 두르고 싶다면 완장은 더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와 선생님 간의 대화를 들으신 아빠는 조금은 익숙한 광경이셨는지 슬쩍 웃으시며 무줄 완장을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고, 나와 남동생 그리고 사촌 남동생들 모두는 똑같이 무줄 완장을 차고 조문객들을 맞았다.

   치마로된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 무줄 완장을 두른 내 모습이 조금 낯설긴 했던 것 같다. 조문객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장례식장에 함께해 주신 분들(모두 여성분들이셨다) 중 두 분 정도가 나를 붙잡고 물어보셨다. 질문은 '이 완장 누가 줬느냐, 보통 손녀들은 안 하는데 혹은 이거 누가 두르라 그랬냐, 여자들은 두르는 거 아니다'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제가 두르고 싶어서 더 달라고 했어요'였다. 그러면 돌아서는 내 등 뒤로 '할머니한테 애정이 깊었나 봐' 하는 말소리가 슬며시 들려오기도 했다.

   아마 그분들은 장례를 치르는 또 다른 가족들을 도와주러 가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처럼 무줄 완장을 두르고 있는 또 다른 손녀또한 보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 '전에도 저렇게 손녀가 무줄 완장을 두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지'라고 생각하시며, 또 다른 그 손녀에게는 무줄 완장을 두른 이유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보실 수도 없는 무줄 완장 따위에 연연하며, 그것이 할머니에 대한 내 애정의 표현인 양 누런 띠를 붙잡고 장례를 치렀다. 내가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것은 할머니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에게 늘상 물어 보셨던, '내 죽으면 장례 치를 때 울어 줄 거냐'는 부탁 아닌 부탁 하나뿐이었다.

   나는 장례 내내 정말 많이 울었다고,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할머니와 정이 깊었나 보다는 말도 했었다고, 할머니 당신은 보셨냐고. 사실 요즘도 당신 생각에 자주 울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서 웃고 계시냐고. 왜 요즘에는 꿈에도 나타나 주지 않으시냐고. 오늘도 허공에 대고 혼잣말만 한다.

영화 <코코(Coco)>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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