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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Sep 01. 2019

네가 한눈에 들어오면

재수생의 가을 단상

  1.  

  오늘 거실에 걸려 있는 3단 달력을 한 장 더 뜯어 냈다. 3개월치의 날짜가 한눈에 보이는 3단 달력,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된 9월의 나날. 그 말은 곧 나의 시험일이 한눈에 들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이렇게 큰 시험을 앞둔 것이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매 순간이 처음이라 새롭기도 해서 드디어 내 시험일이 달력에 보인다고 가족들에게 공공연히 강조했던 것도 같은데, 올해는 조용히 혼자 달력을 뜯어 내는 것으로 혼자만의 의식을 치렀다. 작년부터 나에게는 내 시험 날짜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시기부터가 어쩐지 가을의 시작인 것만 같다. 때맞추어 날씨가 선선해지기도 하지만. 

  내년부터는 거실에 3단 달력이 걸려 있지 않을 것이다. 매년 동일한 디자인의 달력을 제공해 주던 아버지의 회사와 우리집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7월 말에 정년 퇴직을 하셨다. 두 회사를 각각 8개월, 1년 반 정도 다니고 그만둔 그때의 나에게도, 새로운 입사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정년 퇴직'이란 말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는 말인 것처럼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아버지가 정년 퇴직을 하실 때에 내가 사회에서 자리잡고 있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쩐지 죄송스럽고 스스로 부끄러웠지만, 나는 뻔뻔하게 집에 들러붙어 올해의 9월을 맞는다.


  2.

  작년에는 대학원 졸업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나니 이미 7월 초가 지나 있어서, 물론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 중간 중간에도 임용 공부를 병행해 본답시고 설치기는 했지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내려온 뒤로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내 자신을 위한 휴식 시간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나마 잠들기 전에 요가를 하는 게 쉬는 시간이었는데, 그것도 쉬려고 한 게 아니라 공부할 체력이 떨어질까 봐 필요에 의해서 하는 이유가 더 컸다. 그마저도 생각보다 공부가 늦게 끝나면 피곤해서 하지 못하고 잠들기가 일쑤였지만. 그런 생활을 그래도 버틸 수 없었던 것은 시험일까지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의 공부를 시작하려고 보니, 올해는 작년과 달리 장기전이라 그대로 가다가는 내가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는 새로이 '공부 총량제'를 도입해 보았다.

  '공부 총량제'가 무엇인고 하니, 스톱 워치를 사용해서 나의 '순 공부 시간(흔히들 '순공 시간'이라 부른다)'을 체크하고, 내가 계획한 하루의 할당량을 다 채우기만 하면 그 이후의 시간은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이 스톱 워치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 기계는 왜 쓰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었는데, 막상 써 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왜 '순 공부 시간'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생각했지만 화장실을 간다거나, 책을 찾으러 집안을 돌아다닌다거나, 인쇄를 한다거나 하는 이런저런 이유로 '순 공부 시간'에 포함되지 못하고 증발하는 시간이 꽤 많았던 것이다. 

  또한 일주일에 공부하기로 한 총량을 채우기만 하면 되고, 그 안에서 하루의 공부량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허용했다. 가끔씩은 머리가 지끈 거려서 어떤 공부도 할 수 없는 날이 생기기 마련인데, 작년에는 그런 날조차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정 그렇게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날에는 한두 시간이라도 일찍 잘 수 있게 하고, 몸이 회복된 날에 그때 못 한 시간만큼 채울 수 있게 해 주자 싶었다. 나는 그런 세부 조항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세워 놓은 계획을 어겼다는 것 자체로 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서, 이번에는 아예 나를 위해 시간 운용의 자율성을 부여해 놓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정해 놓은 시간만큼 공부하고 나면,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아침잠이 많아 오전 시간의 공부가 힘들었던 나에게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오전에 공부를 많이 해 놓아야, 하루치만큼의 공부량을 빨리 달성할 수 있고, 그래야 자기 전에 유투브로 재미난 영상을 보거나 연재 중인 웹툰을 챙겨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 화르르 불타 올라 공부를 하는 나를 보며, 새삼 지난날 나의 회사 생활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칼퇴할 수 없는 나날의 연속, 월화수목 야근하고 금요일 칼퇴만 보장되면 다행이었던 시절, 그러고도 주말 중 하루는 교정지 보따리를 들고 카페에 가서 교정을 봐야 하는 생활 속에서 막상 '나인투식스(9-6시)'라는 정규 근로 시간에 100퍼센트 풀파워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무기력하게, 그리고 '어차피 야근인데 뭐'라는 생각으로 딴짓을 하며 보낸 시간이 '나인투식스'의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은밀하게 혹은 날이 갈수록 대범하게.

  그래서 올해는 내가 작별을 고했던 편집자 시절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했다. 하루에 최소 8시간씩 공부를 하면 산술적으로, 비록 급여는 없지만 수험생이라는 직업에 걸맞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을 듯하여, 월화수목금토 6일은 하루에 10시간씩, 그리고 일요일은 주중에 떨어진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6시간, 이렇게 일주일에 총 66시간(완전수 '6'이 두 번 사용되다니 좋지 않은가!)을 알아서 유연하게 공부하기로 했다. 사실 일요일에 빼 놓은 네 시간은 원래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이 변수를 제외하고 나면, 어쨌든 이 방식이 올해 나를 버티게 해 준 가장 큰 동력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가족 문제라던지 급작스러운 병원행이라던지 등등의 이유로 66시간이 55시간이 되고, 50시간이 되었던 때도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3.

  물론 그 남은 시간까지도 공부를 해야지, 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나는 그 이상으로 무리할 자신이 없었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무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 본다. 나는 수업 시간이나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존 적은 많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엎드려 잠들지는 않으려고 기를 쓰고 참았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점심 시간만큼은 사수를 하고 싶어 했던 모순적인 학생이었다. 고 3이 되자 우리 학년의 많은 친구들은 점심 시간이 되기 전, 그러니까 '점심 시간 직전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있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밥을 먹었다. 공식적인 점심 시간이 아니니까 교실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어, 친구들은 복도로 나가서 바쁘게 도시락통을 비우고 돌아왔다. 그래야 한 시간 남짓한 점심 동안 온전히 자습실에 가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식적인 점심 시간에 밥을 먹는 친구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어 열 명 남짓 되었을 때에도(사실 정확한 숫자는 이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꿋꿋하게 교실에서 밥을 먹었다. 밥 먹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그당시 나에게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마지노선으로 여겨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밥 시간만큼은 줄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작년에 임용 시험을 치고 나서 더 확고해졌다. 그때 밥을 더 빨리 먹고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나의 성적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것이 확신이 아니라 오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들지 않는 것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나에게 확신을 부여한다.


  4.

  내가 언제부터 이런 성격이었는지 그 근원을 찾아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볼 때도 있다. 요 근래 떠오른 장면인데, 하루는 중학교 체육 시간에 선생님이 오래달리기를 시키신 적이 있었다. 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달리기 중에는 '그나마' 오래달리기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는 딱 하나다. 다른 친구들이 걸을 때에도 내가 뛰면 되었기 때문이다. 숨은 턱턱 막혀 오고, 그냥 중간중간 걸어간다고 뭐라할 사람도 없었는데, 나는 중간에 한 번이라도 걸어가는 게 너무 싫어서 이를 악물고 뛰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나이의 딱 절반이었던 열다섯, 그때의 나도 여전했구나, 생각하고 나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 속에서 함께 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외롭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5.

  지난 십 년, 그러니까 나의 20대 시절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눈앞에 주어진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다음 학년으로 또 다음 학교로 올라가고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더 이상 공부가 내 삶의 전부가 아니게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을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즐거운지 등등 '나'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해 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앞으로의 십 년, 그러니까 나의 30대 시절이 '나'의 근원이 어디일까를 찾아가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가 나에게 미쳤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는지, 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할머니의 존재가 내 예상보다 얼마나 컸는지 깨닫고 있다. 이런 고민을 조금 더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때늦은 후회가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어제 EBS 수능특강 교재를 풀다가(국어과의 경우 수능 국어 영역과 연계되는 지점이 있어 임고생들이 EBS 교재를 종종 활용한다)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의 일부가 수록된 지문을 만났다.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 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요즘 내가 하던 생각과 너무나 비슷한 내용이 활자로 펼쳐져 있어서, 문제를 풀다가 울었다. 다들 서른이 넘어가야 이런 고민을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너무 늦었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할머니가 나에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 되어 버린 사실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슬펐다.

  할머니를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떠올리고 싶은데, 한 편의 글만 써도 그 여파가 꽤 오래 가서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사진과 동영상, 할머니의 목소리가 녹음된 메모도 임용 시험이 끝나고 돌아와 몰아 듣고 펑펑 울려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렇게나 쓸데없이 비겁하고 현실적일 수 있다니. 할머니는 나를 이렇게 키우지 않으셨을 텐데.


  6.

  울면서 전공 공부를 하고 있자니, 내가 왜 나의 전공을 사랑했는지 또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닫는다. 나는 사람을 울게 만들 수 있는 내 전공이 좋았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학문이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을 울게 만드는 사람을 키워 내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작년에는 윤동주의 시를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를 하면서는 몰랐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았을 그 시절을 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반성하고 자책하는 것으로 삶을 몰아갔던 시인. 그 삶의 무게를 이제야 겨우 가늠해 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어, 윤동주를 '저항 시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올해는 펜을 바꿨다. 서술형 시험을 치르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에게 가장 유명했던 제트스트림 펜을 버리고, 모나미 FX ZETA 펜을 손에 익히고 있다. 사실 이미 손에 익었다.


  8.

  교육학 공부를 하다 보면 학생들을 평가할 때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라는 내용이 강조된다. 그런데 임용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과정'을 중시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작년의 경쟁률을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35명의 수험생 중 34명은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 과정에 의의를 두며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 역시 내가 그 34명 안에 들지 않으리란 보장 따위는 없다.

  작년에 1차 시험 결과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되짚어 본다. 분명 당일에는 많이 울었던 것 같은데, 이삼일 뒤부터는 사립 시험을 보러 다니며 이내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나는 그 회복력이 '나는 할 만큼 했다'라는 후련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연애 문제에서도 그랬고, 출판사 생활에서도 그랬고 나는 할 만큼 했었기 때문에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입장은 무관하다.)  그랬기에 미련도 후회도 없었고, 그건 작년 임용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올해 역시 할 만큼 해 보고, 그다음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다가올 최악의 경우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의 '과정'만큼은 인정해 주기 위해서, 하루하루 공부를 하는 것으로 마음에 방어벽을 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들은 결국 결과로 나를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 내가 나의 과정을 알아 주는 수밖에. 시험에 붙어도 붙지 않아도 나는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므로.


  9.

  올해는 어쩐지 마음이 초연하다. 작년에는 붙을 거야, 붙을 수 있어, 이런 주문을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한 해만에 '겸손'이라는 게 조금이나마 생긴 것일까. 아니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깨닫고 있기 때문일까. 이 초연함은 시험을 며칠 앞두고부터 사라지기 시작할까.

  사실 나에게는 마법의 주문이 하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 경험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라고 주문을 걸면, 슬프고 암울한 그 상황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하나는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용 시험을 준비하면서는 그런 주문이 하나 더 늘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 경험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라는 무적의 주문. 내가 작년에 시험을 떨어져 보지 않았더라면, 나의 공부가 한없이 미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내가 돌고 돌아 교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보다는 좀 더 부족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학생들을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기가 나를 더 좋은 교사가 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분명. 근데 그건 시험에 붙었을 때나 결과론적으로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에잇, 몰라. 


  10.

  달력을 보는데 네가 한눈에 들어오면 나는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임고생으로 맞이하는 두 번째 가을이다. 바람은 선선하고, 너는 바람처럼 선선히 다가올 것이다. 그때쯤 나는 겨울이 오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올해는, 부디 너를 기분 좋게 배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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