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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Nov 27. 2019

고시생이 고시생에게

   임용 1차 시험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공립 시험 다음날 필기 시험을 보는 사립 학교가 하나 있길래 2차 스터디 준비를 위해 한두 달 머물 방을 구할 겸, 이번에는 시험 전날 묵은 숙소에 하루 더 머무르다 집에 내려왔다. 작년에는 엄마가 동행해 주셨는데, 그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어서 올해에는 혼자 서울에 올라갔다 왔다. 그러니까 시험이 끝나고 집에 온 지 이제 3일밖에 되지 않은 것인데, 나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망연한 상태다. 늦잠을 자 보려고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고, 멍하니 미뤄 뒀던 웹툰을 정주행하다가도 이래도 되나 싶어 어리둥절하다. 다음주부터는 2차 스터디를 시작하게 될 테니 이런 사치를 부릴 시간도 이번 주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생각 없이 지내 보려 하다가도, 매주 줄줄이 이어지는 사립 학교 시험을 대비하여 수능 비문학을 출력해서 풀까, 아니면 뭘 해 볼까 고민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잊어 버린 사람 같다. 아니, 어쩌면 더 정확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에게 선물할 용기가 없는 사람 같다. 어제는 임용 시험이 끝난 뒤로 미루어 두었던 사립 학교 몇 군데의 자소서를 쓰고, 2차 스터디를 구하고, (기대와 달리 쉽게 구해지지 않아 스트레스를 불러일으켰던) 방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이 모든 걸 오전 중에 끝내고 오후에 거실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찝찝한 것인지. 오늘 아침에도 알람을 듣기 전 일찍 일어나 버린 나를 보고, 그래 됐다, 한숨을 쉬며 차라리 글이나 쓰자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내 하루하루가 불안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정말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 똑똑함은 그저 타고난 머리가 좋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타고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겠지만, 어쩐지 그 정도의 차이도 다 극복해 버릴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게 공부할 수밖에 없게끔 내 기준에서는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측면이 많았던 학교 풍토도 한몫을 했지만,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였기에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선물해 준 것이 내 모교가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게 공부했으나 나를 비롯한 또 많은 친구들은 소위 '한 방' 싸움인 수능 시험에서 자기가 기대한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했고(물론 지금의 나는 그때의 점수라도 받은 것이 너무나 운이 좋았던 것임을 안다),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정시 모집 이전에 미리 원서를 써 놓았던 수시 모집에도 응하게 되는데, 그때 내 친구 중 세 명은 같은 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하였고 나 혼자 다른 학교를 지원해서 거기에 붙었었다. 그 친구들 세 명과 나까지 이렇게 네 명은, 내 기억이 맞다면 모두 함께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네 명이 (아무리 넷 다 진학할 대학이 빨리 정해졌다 할지라도) 대학 입학 전 겨울에 통영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아마 모의고사 성적에 따라 성적순으로 1달~1달 반 정도마다 자율학습실 자리를 바꾸는 학교의 시스템 때문에 근처에 앉아 있다가 친해진 것이려나.

   여하튼 그렇게 넷은 대학에 진학했는데, 홀로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낯선 과 생활이 어렵기도 했고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아서인지, 돌이켜보면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친구만큼 좋은 친구를 대학교에서는 만나기 힘들다는 어른들의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와서인지, 우리들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때마다 만나자고 연락을 하고 날짜와 장소를 잡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넷 중에 항상 나 혼자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속상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과연 무엇에 속상함을 느꼈던 것인지 지금의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놓으면 놓아질 인연인 것 같아서 속이 상한 건지, 그냥 단순히 내가 번거로운 일을 맡아서 하기 때문이었던 것인지, 내가 그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만큼 그 친구들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어쩌면 복합적이었겠지만,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그때 나라는 존재가 그 친구들에게 부담스럽고 버거웠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속상함이 마음속에 피어나기 시작했으나 막상 그걸 밖으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웠던 것이,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친구들이 나를 어이없어 하며 사이가 단절될까 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세 친구가 국가고시를 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행정고시, 한 명은 외교원, 한 명은 로스쿨. 예전에 말하는 소위 '3시'생들 옆에서, 대학을 마치고 거의 곧바로 출판사 생활을 시작한 나는 상대적으로 '자리를 잡은' 친구가 되어 버렸고, 그런 나는 대학교 시절 내가 느꼈던 사소한 감정을 풀어 내지 못한 채 수험생인 친구들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험 일정상 부담이 되지 않는 시기라 기적같이 넷이 만날 수 있는 날이 생기면 내가 신림동 고시촌 안으로 이동하고, 밥을 사 주고 오려 했고, 만나면 내가 겪은 황당하고 웃긴 일들을 풀어 놓고 오고는 했다. 다음엔 이때쯤 보자고 약속을 했다가도 누구 하나가 시험을 예상보다 잘 보지 못하면 연락이 닿지 않고, 보기로 한 날짜가 닥쳐서야 약속이 취소되기도 했다. 나는 그때 내가 고시생이 되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내가 더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온전한 이해가 아니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그런 시간들 속에서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 역시 나름대로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힘든 일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하기사 살면서 안 힘든 날이 있기는 했나 모르겠지만). 그럴 때 로스쿨을 다니던 친구는 그래도 그 친구들이 고시를 준비한다고 힘들지 않냐며, "그래도 네가 좀 이해해 줘라."고 말했었는데 나는 그 말에 또 서운함을 느끼고, 여하튼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내가 두 곳의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을 무렵, 고시생이었던 친구들이 합격 소식을 알려 왔고, 나는 그제야 서운함을 토로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사실 내 감정이 동요했던 시기는 아주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었지만,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친구들한테 나의 말이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이 역시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시험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관계를 정리하고 나서 합격 소식을 SNS에 올린 그 친구의 글에 수많은 고등학교 동창들의 축하 댓글이 달리고, 거기에 환하게 응답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차라리 우리도 그런 사이였으면 좋았겠다 하는 이상한 아쉬움마저 들었다.

   



   나는 오랜 시간 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가장 많이 노력했다고 확신해 왔다. 나는 수험생인 친구들의 상황을 배려하고 기다려 주는 꽤 괜찮은 친구가 아닐까 자부했던 적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절 내가 그들을 향해 가졌던 그 마음이 오롯이 친구들에 대한 순수한 우정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좋은 친구'로 보이고 싶은 내 이기적인 욕구를 우정으로 포장하였기 때문에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닐는지.

   당시에는 내가 그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연락을 자주 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 연락에 답장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며, 그저 시험 치고 나서 예정대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만 알려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게 너무 큰 바람이자 나의 욕심이었음을 임고생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열심히 노력한 시험에서 내 생각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거나 혹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될 때의 허탈감과 절망감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감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년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나는 시험에 붙고 나서 연락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미루어 두었던 몇몇 지인들에게 끝내 연락하지 못했다. 도저히 미루어 둘 수 없는 상황이라 답을 한 경우에도 엄청나게 힘을 짜 내야 했다. 나는 예전 고시생 친구들을 지켜보았던 그때의 내 마음을 기억하기에,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늦게라도 나의 소식을 알려 주면 그것으로 내 주변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최소한 그것만큼은 하는 수험생이 되는 것이 이 시험판에 뛰어들 때 내가 가진 목표였다. 그런데 그런 목표가 도리어 나를 너무 별로인 인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것만큼은 하자 싶어서, 내가 시험에 떨어졌으며 그래서 이러한 감정을 느꼈고 그래서 연락이 늦었다고, 변명을 최대한 하지 않기 위해 솔직한 내 심정을 밝히고 나면 그 말들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초라함을 느끼는 나를 보며 그 시절의 내가 정말이지 좋은 친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공감도 되지 않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 주는 것이 그때의 그 친구들이 보여 준 최고의 우정이었음을 서른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나를 만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상황을 자꾸 돌아보게 만들고, 더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에게는 서른이라는 내 나이가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중시키고 있지만, 그때의 그들은 그때의 나만큼이나 어렸기에 그 적은 나이가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중시켰을 것이니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들었겠지 싶다.

   내가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이제는 매듭 지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친구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를 떠올리며 '그때 걔도 출판사 다니느라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줄까 하는 가정을 했을 때였다. 나는 그때 그 친구들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 친구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 모습에서 그 관계의 끝을 보았던 것이다.

   내가 만약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지 않고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면, 그리하여 졸업 무렵부터 임용시험을 준비했더라면, 그래서 그때부터 그 친구들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수험생이었다면 우리의 지금은 조금 달랐을까? 그래도 그 시절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그래서 후회가 없다고 나는 말해도 되는 것일까? 사람은 겪은 만큼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다 겪을 순 없으니 간접적으로라도 많이 겪어 보라고 독서를 권유한다지만, 겪지 않은 것과 겪어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제와 이런 감정을 느껴 보고 나니, 지난 20대 시절 내가 얼마나 많은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위한답시고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편할 대로 행동했었나 싶어 아찔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하나 새로운 경험을 해 나갈 때마다, 지나온 내 삶에는 반성할 거리만 넘쳐날 것이 눈에 선하여 막막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합리화의 달인이니, 더 늦기 전에 고시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뒤늦은 미안함과 그 시절 힘들었겠다는 때 지난 위로만 건넬 뿐이다. 그 고시와 이 고시는 다른 시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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