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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Nov 28. 2019

'덤'에 대하여

   올해 임용 시험의 1차 시험 날짜는 11월 23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11월 넷째 주 토요일이었는데, 어이 없게도 나는 그 날짜를 보고 10년 전, 그러니까 2009년 11월 23일의 나를 떠올렸다. 내가 대학에서 처음 연애를 시작한 날이 11월 22일이었는데, 그 숫자가 너무 외우기 쉬워서인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10년 전 11월 23일, 잠에서 깨어나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 맞는지 비현실감을 느끼다가, 남자친구가 된 친구와 오늘은 언제 볼 것인지 연락하며 현실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10년 후인 2019년 11월 23일에 내가 두 번째 임용 시험을 치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나이의 앞자리는 바뀌어 서른 살이 되었는데 내가 재수생이 되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많아져서인지 이번 수험 기간 동안에는 지나온 나날에 대해, 그 나날 속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문득문득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깨달은 것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내 삶이 행복한지 혹은 내가 무엇으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는 시점부터는) 그저 눈 앞에 다가오는 시험, 또 다음 시험을 치르며 소위 '퀘스트'를 깨면서 살아간 듯했다. 그러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한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첫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내 기억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처음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 있었으리라 싶다.

   첫 연애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연애가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사랑'이라는 요소가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웹툰(예전에 친한 선배가 추천해 준 작품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시작하지 않았다가, 올해 간간히 챙겨 봐서 정주행한 명작(!)이다)에 등장하는 개념을 차용하여 설명하자면, 나의 '프라임 세포' 중 하나가 '사랑 세포'임에 틀림없음을 나는 그때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들수록 '감성 세포'는 '프라임 세포'의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런데 내가 이런 사람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다시 말해 남자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나'의 상태를 불완전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순간에는 그냥 혼자 있는 '나'의 상태가 완전한 것이고 남자친구라는 존재로 인해 그 상태가 더 충만해질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첫 연애가 끝난 이후에는 홀로 된 '나'의 상태를 불완전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불완전함을 벗어던지고 싶어 오랜 시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아 어긋난 많은 인연들 속에서 상처받으면서도 그것을 빨리 털고 일어나는 나의 경험담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고는 했었다.

   그래서 나와는 달리 자신의 인연을 순탄하게 만나는 것처럼 보였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상당했다. 연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지인이라면 그걸 알기 때문에 얼마나 좋을까 싶어 부러웠고, 연애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보였던 지인이라면 그런 사람조차 움직인 인연이니 얼마나 좋을까 싶어 부러웠다. 그렇게 부러움을 느끼며 친한 지인들의 달달한 연애담을 마냥 기뻐하며 축하해 주지 못하는 내 모습에 또 자괴감과 한심함을 느끼는 날들이 많았다. 한 몇 년 전부터는 오랜만에 누구를 만나러 갈 때면, (그 사람이 얼마 전까지 나와 남자친구가 없는 것에 대해 함께 한탄했던 사람이었을지라도) 새 인연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려 줄지도 모른다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가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무렵 오랜만에 연락 온 지인들 몇 분이 (남자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결혼 소식을 알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많은 지인들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이나, 남자 친구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려 주어서 나는 혹시나 나의 부러움과 질투심이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분명 잘되지 않았을 것이고,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지인들은 그러한 나를 배려하여 최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간략히 마무리했으리라.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대학 시절 만났던 첫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그와 나의 연애는 아주 오랜 시간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내 자존감을 갉아 먹었지만, 그럼에도 그때 나는 누군가가 들려 주는 연애 이야기에 오롯이 감정 이입하여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었고, 내가 그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는 표정 관리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좋은 친구, 좋은 선후배가 될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도 쉬웠는데 지금은 그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러니까 나는 지나간 인연인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그때의 '나'를, 그러나 이제는 점점 흐릿해져 가는 그때의 '나'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것이리라.

  



   도대체 이런 나의 심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옹졸하기 그지없는 나의 심리를 토로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그런 마음을 인정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년에 친한 언니가 나에게 보내 준, 미국의 전설적인 시트콤 <프렌즈(FRIENDS)>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챈들러와의 결혼을 앞둔 모니카에게 레이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레이첼: 모니카, 내가 오늘 밤 왜 로스랑 함께 있었는 줄 알아?
모니카: 알고 있어!
레이첼: 넌 몰라!
모니카: 그래, 그럼 왜?
레이첼: 난 슬펐기 때문이야.
모니카: 그게 무슨 뜻이야?
레이첼: 난 너희가 약혼한 게 너무나 기뻐. 근데 너희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내가 안 한다는 걸 상기시키잖아. 난 가망성도 안 보이거든. 그냥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나 봐. 바보 같은 줄은 알지만 너도 너무 우울해 했잖아, 로스가 결혼할 때 말야.
         
- <프렌즈> 시즌 7의 에피소드01, "Monica's Thunder" 중에서

   주변 지인들이 소중한 인연을 만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은 나에게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통해 때때로 나의 현재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집에 내려와 고요한 일상 속에서 수험 생활을 하면서, 나는 여태껏 내가 지녀 온 생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홀로 있는 지금의 내 상태 자체가 완전한 것이며, 누군가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이 기적 같은 '덤'이라는 것을.

   이강백의 <결혼>이라는 희곡에는 등장인물인 '남자'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모두 빌렸던 겁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 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겁니까? (넥타이를 빌렸었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럼 당신은 나를 이해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서 넥타이를 빌렸을 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었소? 마구 험하게 했었소? 어딜 망가뜨렸소? 아니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 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 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이 희곡에서 의미하는 '덤'과 내가 생각한 '덤'의 의미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지 않기로 했다. '덤'으로 주어지면 너무나 감사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나'의 인생을 온전하게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집에 내려와 1년 반 정도 머물다 보니, 이제는 내가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언젠가 당연히 결혼을 하고, 당연히 아이를 낳고, 그래서 당연히 엄마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한평생을 함께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자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가 굵어진 채로 집에 내려와 전형적인 경상도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강해진 생각이기도 하다.

   '함께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면 혼자 살 수도 있겠지'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썩 불쾌하지도 않다. 그런 가정을 함으로써 지금의 내 모습은 불완전하지 않은 것이 되고, 나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흔히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눈을 좀 낮춰."라는 말에도 흔들릴 필요가 없게 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직업 중 쉬운 것은 없지만 자신이 좀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존재하듯, 사람 사이에도 자신에게 좀 더 잘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보통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해 좀 더 파악하게 되므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눈을 낮추라고 하는 것일까. 연애를 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면, 연애와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의 범주에 넣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을 감당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연애도 결혼도 선택하면 그뿐이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말해 놓고도 나는 결혼한 친구를, 연애하는 친구를 많은 순간 부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은 헛헛한 마음에 잔잔한 발라드 노래를 들으며 울기도 하겠지.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화면 속 너희들이라도 행복하라고 축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날도 있겠지. 그러다 또 어느 순간은 가치관이 바뀌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새로운 직장을 잡기 위한 중요한 과정에 놓여 있는 지금의 나는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저 내 스스로가 조금 더 성숙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프라임 세포 중 하나는 사랑 세포이며, 나는 사랑 세포를 프라임 세포로 가지고 있는 '나'를 꽤나 사랑하므로, 아주 가끔은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스치듯 바라고는 한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그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날 예정이라면 내가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그 사람의 삶이 너무 힘들고 버겁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을 읽으며 당신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나희덕, <푸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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