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1.66점,
이번 서울 지역 중등교사 임용 시험 1차 합격자 커트라인 점수와 내 점수의 차이.
2점,
이번 '서울' 지역 중등교사 임용 시험 1차 합격자 커트라인 점수와 '경기' 지역 중등교사 임용 시험 1차 합격자 커트라인 점수의 차이.
그러니까 올해도 나는 임용 시험 1차에 불합격했으며, 올해 나의 점수는 서울을 제외한 경기 등 다른 지역에 지원했다면 합격했을 점수라는 것. 이 사실이 가져다 준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과 상실감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십여 일을 보내야 했다.
사실 임용 시험과 관련된 최종 공고문이 떴을 때, 그보다 몇 달 전 공지되었던 사전 공고와 다르게 경기도에서 몇 년만에 국어 교사를 101명 선발한다고 발표해서 소위 '멘붕'이 오긴 왔었다. 전년도처럼 서울과 경기가 비슷한 수의 인원수를 뽑는다면 경기도에 연고도 없고, (서울과는 다른) 경기도의 2차 시험 방식이 부담스러웠던 나로서는 경기도에 지원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서울과 경기의 선발 인원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다 보니 분명 경기도의 1차 합격 컷이 낮아질 것 같아서, 소신 지원을 할 것이냐 확률을 높이기 위해 경기도에 지원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시험 성적이 '설마' 서울과 경기의 커트라인 점수 그 사이에 놓여서, 경기를 썼으면 붙을 점수로 서울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1차 시험에 붙는다면 커트라인을 훌쩍 넘어서 안정적으로 붙으리라며, 당시의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설마'에 내가 당한 것이다. 아니, 그 '설마'가 내 실력이었던 게 문제였겠지만.
나는 왜 서울에 지원하고 싶었을까.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스무 살 때부터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 근처에 터를 잡았고, 그 근방을 떠나지 않으며 직장 생활을 했고, 그러고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모교의 교육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서울에서 거의 10년의 세월을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교 근처의 이 동네에서만 10년을 산 것이지만. 나에게 이 동네는 지방에서 올라온 새내기 한 명이 낯설기 그지 없는 대학교 생활에 적응해 보겠다고 온갖 흑역사를 생성하며 버둥거리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며, 서울 생활에 적응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던 그 시절의 애잔함이 묻어 있는 곳인 동시에, 그런 곳이 결국에는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게끔 만들어 준 소중한 인연들이 거쳐간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지나간 시간만큼 저만치 멀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지금 내 삶을 채워 주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에서 만난 이들이다. 그들은 각자 서울에서 멋지게, 매일매일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결국 서울에서 혹은 서울의 근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조금 더 편하게 자주 보기 위해서는 내가 서울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서울 지역에 응시한 가장 주된 사고의 흐름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리고 그들과 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많은 문화적 자본과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곳이라서 등등 무수히 많은 이유로 나는 집에서 임용 시험을 준비하며 서울을 그리워했다. 반 년, (초수 때 임용에 떨어지고 나서는 일 년을 더해서) 일 년 반, 이렇게 서울로 복귀할 날이 늦추어질수록 서울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졌던 것도 같다.
그러다 올해 이렇게나 애매한 점수로, (소숫점 차이로 떨어지신 분들이 많을 거란 걸 알아서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까운 점수로 떨어지고 나니 이제 서울에 대한 혼자만의 짝사랑을 거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번 결과가 더 마음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넘은 나는, 그리고 이제는 올해와 같은 결과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나는, '당연히' 서울에서 근무하리라는 내 당연한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주변 친척들도 이러한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신다. 그런데 나는 그 지지에 감사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왜 아무도 다시 한 번 서울에 응시해 보라는 응원을 해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느낀다. 사실 알고 있다. 혹시나 내년에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서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것보다는 지역을 옮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셔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걸. 그런데 나는 지금 마음이 옹졸해진 상태라 때때로 내가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시간들과, 이곳에서 만들어 놓은 소중한 인연들이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느낌이 들 때면 무척 서럽다. 어른들 말처럼 사람은 어디서든 적응해서 잘 살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만약 1년 더 열심히 공부하면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1년 더 공부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올해의 시험을 치고 나서 (누군가는 시험에 떨어진 패배자의 합리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험의 결과가 공부량에 정비례한다는 확신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생각은 사실 초수일 때도 들긴 했었지만, 1년 내내 공부했던 재수 시절을 거치며 더욱 강해졌다.
물론 모든 시험과 마찬가지로 임용 시험 또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올해 나의 결론이다. 정답을 알 수도 없고, 내가 틀린 문제가 무엇인지 맞은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시험 체계 속에서는 올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내년을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법, 문학, 국어교육론(듣기/말하기, 읽기, 쓰기)의 세 영역으로 이루어진 전공 국어 영역에서 내가 어떤 부분이 약한지, 그래서 어디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누누이 이번 임용 시험이 나에게 있어 '전업'으로 수험 생활을 하는 마지막 해라고 다짐해 왔다. 임용 시험이 지닌 불확실함을 오롯이 한 해 더 지고 가기에는 내 이력서상의 공백이 길어진다는 측면에서도, 내 정신적 건강의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학교 현장에서 경력을 쌓는 것과 공부를 병행해야겠다고 결심했던 터라, 나는 임용 시험에 불합격한 걸 알고 나서도 그 허탈함에 마음껏 젖어 있을 수 없었다.
작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전에 불합격 공고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오후에 남아 있는 사립학교 정교사 공고 및 기간제 공고를 날짜별로 정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물론 울면서 정리했지만. 사실 공립 1차에는 불합격했지만, 점수 차이가 얼마 나지 않다 보니 (공립 임용 1차에 떨어진 사람들 중 자신이 지원한 사립학교별로 성적이 높은 순대로 사립학교의 1차 시험을 합격한 것으로 대체해 주는) 위탁사립에 합격한 것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게 만든 요인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는 며칠 동안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힘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 최초로 내 몸 안에 쌓아 두었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그 무엇도 열의를 가지고 해 낼 수 없었다. 나는 공립 임용에 합격하기 위하여, 1.5배수 안에 들기 위하여 임용 시험 공부를 해 왔는데 위탁사립의 7배수 안에 들었다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초수 때 운 좋게 사립 정교사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었던 그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는 것도 올해 들어서야 깨달았다. 100명이 필기 시험을 보아서 5명만이 수업 실연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중 3명만이 최종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그때, 나는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 생활에 대해 잘 모르시겠네요?'와 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었다. 사실 경력이 있어서 바로 실전에서 학생들을 잘 지도할 수 있는 교사를 사립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음을 지닌 관리자들의 마음도 이해된다. 다만 나는 그때 5-6년 전 출판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보았고, 5-6년이 지난 뒤에 똑같은 상황에 놓인 내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종교 재단인 학교에 당당하게 '무교'라고 써 냈으니 경력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적격자가 아니었겠지만. 여하튼 그 당시에는 초수생이 최종 면접까지 올라가 본 게 어디냐, 정말 좋은 자산이 될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도리어 올해의 나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2년간 준비해 놓고 써먹지 못한 공립 임용 2차 시험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탁사립 스터디가 생각보다 잘 구해지지 않아서, 스터디를 구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봐야 부모님께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서울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내려가서 온전히 쉰 날은 하루도 없었다. 임용 공부를 했던 내 책상과 쌓여 있는 공부의 흔적들을 보며 한참을 울다가도, 여러 학교들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만들고 보내고 그런 며칠을 보냈다.
집 근처의 중학교에도 기간제 원서를 제출했다. 그 학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중학교인데, 그래서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졸업한 중학교이기도 했다. 워낙 학교도 크고 교육열도 높은 곳이라, (특히 사립 학교의 경우 공립 학교보다 기간제 공고가 일찍 떠서 몰리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서류 전형이나 통과되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서류 전형에 통과가 되어서 며칠 뒤에는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그날 하루 종일 다양한 교과의 기간제 선생님들을 다 뽑아야 했기 때문인지, 수업 실연은 교수-학습 지도안을 작성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이후에 면접이 진행되었다.
솔직히 서류 전형에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이든 떨어지는 것보다는 붙는 게 기분이 좋으니까) 기쁘면서도, 나는 무엇인가 해 나갈 기력이 생기지 않는 내 자신에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모든 것을 내려놓지는 못하면서 예전처럼 열중하지는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인간, 그것이 딱 내 모습이었다.
그런데 참 웃긴 것은, 이른 시간 그 학교에 도착해서 창문 밖을 보면서 내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걔네도 여기서 공부했겠지, 걔네도 저렇게 뛰어놀았겠지. 그러면서 임용 시험에 불합격한 소식을 받은 이래 잠깐이지만 내 몸속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고, 그 찰나의 생기를 부여잡고 면접을 봤다. 면접을 보면서도 내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저 면접관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겠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 대 다 면접이었는데 다른 선생님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나만 또 무경력이었다.
그렇게 기간제 면접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서, 위탁 사립 준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주변에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랬다.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명퇴를 하신 외삼촌과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명퇴를 하신 외숙모가 도움을 주시겠다고 해서(사실 너무나도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처음에는 정말이지 민망해서 그냥 회피하고 싶었다) 그분들 앞에서 수업 실연과 면접 연습도 며칠간 했다.
이런 노력을 하는 것까지가 당시의 내 최선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힘이 없었고, 어떨 때는 아예 깔끔하게 다 떨어져서 다른 수험생들처럼 그냥 널브러져 있고 싶다는 생각(그렇지만 누군가에겐 내가 얻은 위탁 사립 기회 자체가 소중한 것일 수 있으므로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 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위탁 사립은 장렬하게 떨어졌고, 그래서 올해 나의 재수 생활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할 말은 많지만 생각할수록 내가 힘들기 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집 근처 중학교의 기간제를 붙었다.
내 입장에서는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학교인데다, 좋은 학교여서 내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고등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진로진학 부담이 적어 '주경야독'하여 임고와의 병행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최선의 시나리오다. 물론 위탁사립에 정교사로 붙은 것만은 못하겠지만. 그런데 나는 이런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기간제 교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이제 애들 만난다!"고 외쳤던 내 모습에서 올해 내가 살아가야 할 희망을 찾는다. 나는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나를 살릴 것임을 알고 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해 주는 몇몇 아이들을 그 아이들 나름으로, 말을 듣지 않고 나를 화나게 하는 학생들은 그 아이들 나름으로, 나를 살아 있게 해 줄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은 전공 개론서들에 갇혀, 좁은 책상 앞에 갇혀 내가 과연 교사'라도' 될 수 있을까, 내가 교사의 자질이 있긴 한 걸까, 나는 왜 교직을 선택한 것일까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던 시절이었다. 어느새 그 고민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흐릿해진 요즘,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이 전공서를 1회독 더 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에 한 번 서 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런 기회가 생각보다 순탄하게 다가와 주었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기간제를 시작했다가 임용 시험과는 너무 멀어져 돌아오지 못한다는 많은 경험담들과, 그를 우려하여 올 한 해도 수험 생활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지인들을 보며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불안감은 우선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혹시 내가 교직에 맞지 않은 사람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설사 그렇다 해도 한시 빨리 자각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미리 하지 않기로 한다.
나의 서른 살은, 그러니까 2019년은, 1월 2일 임용 불합격으로 시작해서 12월 31일 임용 불합격으로 끝이 났다. 젠장할! 그렇지만 불합격으로 점철된 나의 서른 살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공부와, 내가 쏟았던 노력과 눈물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좀 더 좋은 교사 더 나아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결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지만, 내 자신만큼은 나를 결과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학교 근처의 동네를 눈에 담으며 다시 귀향(동생은 '낙향'이라고 했지만)할 준비를 하는 요즘의 내 마음은 복잡미묘하다. 그렇게 두 달간 머물렀던 원룸의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핸드폰을 하다가, <놀면 뭐하니?>의 유재석 씨가 개그맨 후배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며 이런 얘기를 해 주시는 걸 봤다.
진짜 버티느라 고생들 했다!
나와 비교할 수 없게 오랜 시간을 버틴 개그맨 후배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어젯밤 나는 유재석 씨의 한마디에 위로를 받았다. 나도 조금만 더 버티면, '그때 교사라도 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지.'라는 말을 하는 어른이 되어 있을까. 어쩐지 어젯밤에는 왠지 그런 시절이 반드시, 분명히, 꼭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2월 31일과 1월 1일이 '굳이' 분절되어 있는 이유는 어쩌면, 새해가 밝았다는 핑계로 한 해를 버텨 낸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 주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 버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2019년의 액땜은 제가 다 하였으므로)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