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의 교직 일지 1
기간제로 근무하게 될 학교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한 것이 2주가 다 되어 간다. 그때 대학교와 대학원의 졸업증명서, 주민등록등본, 공무원 채용신체검사 결과지를 들고 교무실에 제출하고 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 20분 동안 수험 기간 동안에는 쓸 필요가 없었던 신경의 많은 부분을 활성화시켜야 했다. 피로감을 느낀 것이다.
예를 들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걸어가다가, 혹시나 싶어 학교 건물 1층 출입구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이어폰을 뺀 것.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안에 계신 선생님들께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고민한 것. 교무실 안에서 추가 서류를 작성할 때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지 속으로는 안절부절한 것. 서류를 드리고 나올 때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고민한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집에서 홀로 공부할 때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고, 그제야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사회생활'의 일부였음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일할 당시 내가 이런 모든 것들을 신경 써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내가 어딘가에 적을 두고 근무한 기억이 요즘은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다만 (3월이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기간제 근무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염려하는 내 모습만이 출판사에서 근무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다.
몇몇 지인들은 짧고 굵게 일하다(사실 '굵게' 읽했다는 표현은 나를 위한 합리화일 가능성이 높다) 출판계를 떠난 나에게 용감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용감하다기보다 겁이 많았기 때문에 편집자로서의 삶을 그만둔 것에 가깝다.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이유야 많았지만, 편집자로 일하면서 어떠한 보상도(내적 보상 및 외적 보상 모두를 통틀어)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과, 이런 생활 속에서 내가 행복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내 자의로 출판계를 떠나온 것이었으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오랜 시간 내가 출판계에서 퇴출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어린이책을 포함하여 대략 2달에 세 권 정도의 책을 출간했던)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딜 만큼의 인내심은 없고, (사수가 없어 하나하나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며 성장하려는 열정도 없고, 회사를 위해 헌신하지도 못하는 '사회생활 부적응자'였기 때문에 내가 출판계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나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같이 근무하던 편집자 선배 중 한 명(특히 내가 교정 및 교열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배웠던)이 아예 직군을 바꾸려는 나에게 모든 출판사가 이렇지는 않다,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정말 많이 늘었다, 편집자를 그만두는 게 아깝다는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이지 내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회사 대표가 퍼부었던 "밥값 해라."는 말을 떠올리며,* 내가 밥값도 못 하는 인간이라 자책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나는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서 대체로 내가 공부한 만큼의 성적을 얻고, 내가 애쓴 만큼의 평가를 받으면서 편집자 시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나갔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특히 올해 임용 시험의 결과가 이렇게 되고 나서, 그리고 (임용 시험에 뛰어들 당시의 나는 생각지 못했던) 기간제 근무를 앞둔 요즘 내가 교직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문득문득 휩싸이는 나를 볼 때면 편집자 시절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내 속에 잠복해 있음을 깨닫는다.
* 존칭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아직 털어내지 못한 나의 앙금(?)을 표출하기로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내가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객관적으로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나에게는 당시의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첫째, 내가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는데 밥값을 하라고 윽박지르는 회사라면 다닐 만한 가치가 없다. 둘째,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정말 내가 밥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면 (업무 능력으로 보나 효율성으로 보나) 이 직종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어느 쪽이든 결론은 퇴사였기 때문이다.
2월 말이 되어야 기간제로 근무할 학교에서는 나를 다시 부를 것이다. 미리 교과서를 구해 수업 준비를 하기도 난감한 것이, 그때가 되어야 몇 학년을 가르치는지 정해지고 구체적인 업무가 분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있는 이 낯선 상황에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또 언제 이렇게 쉬어 보겠나 생각하며 잠도 좀 많이 자고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고 그러면서 '그냥' 있는다. 생각해 보면 11월 말에 임용 1차 시험이 끝난 이후에도 12월 내내 2차 스터디를 하느라, 임용 1차 시험 결과가 발표된 이후로도 1월 중순까지는 사립 학교 전형을 치러 다니느라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1월 중순에 중요한 일정이 다 끝난 이후로는 오랜만에 크게 몸살이 나서 며칠간 누워만 있었고, 1월 말에는 잠시 서울에 올라가 두 달간 머물던 방을 빼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제대로 쉬기 시작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며 합리화를 해 본다.)
쉴 때 쉬더라도, 뭐라도 남기며 쉬어야 나중에 아쉬움이 없지 않을까 싶어 거의 6-7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사회생활의 첫 시작을, 그 출발선 앞에서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남겨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복잡미묘한 감정 속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크나큰 설렘과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찾고 싶다.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출판사를 그만두고 나의 진로를 이렇게 바꾸었을 때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도 근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상기하고자, 교육대학원에 진학한 첫 학기에 제출한 과제를 다시 찾아보았다. 전공 필수 과목인 "국어교과교육론"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나는 어떠한 국어 교사가 되고 싶은가'에 대해 논하는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는데, 2016년의 나는 이런 글을 썼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 선생님은 글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미치도록 열심히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하셨다.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일찍이 그 방향을 정한 편이라고 자부했었다. 학부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싶었고, 글과 문학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는 삶을 살며, 그래서 작가의 꿈을 완전히 놓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고민의 끝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고, 만 2년여 간의 생활 끝에 편집자 생활을 청산했다. 그제야 나는 일과 직업이라는 것은 내 적성과 흥미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그 무엇임을 깨달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국어교사 역시 하나의 ‘직업’임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려 한다.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국어교사가 되고 싶은지를 논하기 전에 이 사실이 필히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역시 학교에 출근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어떠한 국어교사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사실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름대로 목표한 바가 없지는 않았다. 첫 번째로는 문법을 재미있게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대학교에 와서 전공 수업을 들으며 느꼈던 문법의 재미를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글쓰기 대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학생을 말리는 국어교사만큼은 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학창 시절에 겪었던 나름의 상처(?)가 투영된 다짐인 듯하다. 그러나 교육대학원 수업 시간에 교육 현장에 계신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이러한 목표가 현재의 교육 현실 속에서는 이루어 내기 어려운 것임을 자각했다. 차후 교육 현장에 나아갔을 때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내 목표를 어느 정도는 실현할 수 있도록, 내 역량과 주변 상황이 따라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또한 이번 학기에 △△△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아이들에게 글짓기 과제를 내 주게 된다면 반드시 한 명 한 명의 글에 코멘트를 달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교사가 학생의 글을 성실하게 읽었다는 증거만큼 학생에게 힘이 되는 것은 없음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던 15년 전,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써서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다. 쉽지 않았던 일기 쓰기 숙제를 그래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동력은, 일기장에 적어 주신 선생님의 짧은 코멘트였다. 그 덕에 제출한 일기장을 돌려받는 순간을 기다리며 약간의 설렘마저 느끼기도 했다. 이제는 스물일곱 살이 되어 버린 이번 학기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에서만큼은 국어교사로서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기꺼이 투영하리라 다짐해 본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 갈수록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두렵고 무섭고 슬플 때가 있다. 내가 보고 듣고 살아온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언제라도 내가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시도라도 하는 선생님, 그나마 덜 꼰대같은 선생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오만과 편견에 갇히지 않고 그 아이를 그 아이 자체로 이해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주 어려운 일일 듯싶다.
존경받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사랑받는 교사가 되고 싶지도 않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러한 기대가, 기대라는 탈을 쓴 욕심이 때때로 솟구쳐 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이 나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모든 학생이 나를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성실함과 책임감 등등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과 역량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교사 생활을 영위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까지 모두 끌어 앉고 힘들어 하고 싶지도 않다. 거기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기운은 결국 내 속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학생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일 테니 말이다. 어떠한 국어교사‘라도’ 될 수나 있을까 고민하는 요즘,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끄적끄적 초심을 되새겨 본다.
어떠한 국어교사'라도' 될 수 있을까 고민한 4년 전의 나는, 드디어 교직 생활의 출발선 앞에 서 있다. 그 출발선에 선 내 이름 앞에는 '정(正)'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지 않지만, 이 한 글자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라는 두 글자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아야만 내가 올해 기간제 교사로서 만날 학생들에게도, 다가올 임용 시험을 치르며 교직 생활을 이어 나갈 내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보면 울까 봐 차마 시청하지 못했으나, 몇몇 장면만큼은 동영상 클립으로 챙겨 보고 있는) tvN 드라마 <블랙독> 12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국어과 정교사 채용이 '적격자 없음'으로 끝난 와중에 제자들을 졸업시키는 고하늘 선생님(서현진 배우)의 내레이션을 마음에 담아 두려 한다. 결국 나에게도, 다음달이면 나에게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줄 귀한 아이들이 각자의 빛나는 삶을 이고 지고 와 줄 것이므로.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아이들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떠나던 이 순간에,
나는 진짜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라는 틀이
더 이상 나를 흔들 수 없다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