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 관람 후기
나의 제2외국어는 따지고 보면 일본어였다. 고등학교 때 일본어와 중국어 중에서 하나를 골라 수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둘 다 크게 내키지 않아 '그나마' 덜 어렵게 느껴지는(물론 착각이었다) 일본어를 선택하여 수업을 들었으나, 수능에서 괜찮은 등급을 받을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 결국 수능에서는 한문으로 선택 과목을 바꾸어 시험을 쳤더랬다(그렇다고 한문으로 등급을 잘 받은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고 나서 대학교에 진학을 했더니, 졸업 전까지 필수로 제2외국어의 초급과 중급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그나마' 공부를 해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또다시 일본어 수업을 선택했고, 전혀 초급 같지 않은 수강생들 속에서 또다시 수업에 따라가기 급급하다가, 제2외국어 졸업 요건을 채운 이후에는 일말의 고민 없이 또다시 일본어를 포기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나는 '영어라도 좀 잘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내 인생에서 (영어를 제외한) 제2외국어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 없이 살았다. 그랬던 내가, 요즘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 주 중에는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다가, 토요일이면 프랑스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역시나 작년의 그 학생 얘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프리다이빙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등을 떠밀어 주었다던, 내 자궁 근종의 원인이 되는 격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추측하는 그 학생 말이다.
나는 2024학년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 학년도를 견디기가 너무 막막하게 절망적이었고, 그래서 무언가 살아 낼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한 선배 교사가 자신이 다녀왔던 유럽 여행 세미패키지*를 추천해 주었고, 나는 '옳다구나!' 하는 심정으로 그해의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고작 이틀 뒤에 떠나는 유럽 여행을 신청해 두었던 것이다. 동유럽의 몇 나라를 짧게 짧게 거친 뒤, 스위스에서 3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3일을 머무르는 나름대로 긴 일정이었다.
일찍이 여행 계획을 세워 두었으나, 나는 학교 일이 바쁘고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여행지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지 먹고 싶은지 체험하고 싶은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만 딱 하나,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배우고 가서 현지에서 사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여름방학 무렵부터 내 안에서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분명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여행 중 거쳐 가게 될 나라가 여럿이었는데, 왜 하필 프랑스어였는지는. 프랑스어라는 언어 자체에 나조차도 몰랐던 로망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자꾸 소진된다고 느껴져서 무엇인가로 나를 채우고 싶어 했던 차에 프랑스어가 눈에 뜨인 것인지…….** 여하튼 지금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모종의 이끌림으로 나는 결국 11월 말부터 프랑스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매 주 생겨나는 숙제에 허덕이며 학생들의 입장을 새삼 공감하게 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었다.
* 숙소나 이동 등은 일반 패키지 투어처럼 업체에서 모두 챙겨 주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자유 시간으로 구성되어 여행자 본인이 취향껏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여행 방식을 말한다.
** 어쩌면 이퀄라이징 문제로 프리다이빙을 내려놓았던 그 시기의 헛헛함을 프랑스어 공부로 조금은 채워 나갔던 것 같다. 사실 그 둘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어서 대체재가 되어 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때는 하나를 포기한 대신 새롭게 하나를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위로가 되어 주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독려하는 사람이기에.
프랑스어는 예상보다 더 어려운 언어였지만, 그것을 배우는 과정은 기대보다 더 즐거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으로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적성에 더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시간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런 수업을 해 주시는 프랑스어 선생님들을 뵈면서 내가 학교에서 하고 있는 국어 수업에 대해 매 시간 성찰하게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뿐, 나는 이내 쏟아지는 프랑스어의 낯선 문법과 새로운 단어 들의 향연에 수시로 눈이 반짝이고 무시로 짜릿했다. 학교에서 진력이 다 빠져 축 처진 채로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도, 공부를 하고 나오면 생기가 돌았다.
그렇게 학원 수업을 들은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났고, 프랑스 파리에서 머물렀던 며칠 동안 나는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어 인사말 몇 개와 "Vous parlez Anglais?(당신은 영어를 하실 수 있습니까?)"를 포함한 몇몇 문장만을 주야장천 사용해 댔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실력이었지만 프랑스어의 알파베(L'alphabet)를 읽을 수 있으니 어찌 되었든 의사소통이 조금 더 수월했고, 그러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마 조금 더 프랑스어같이 다듬어진 발음으로 할 수 있었다. 미국에 갔을 때는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나의 영어 실력에 항상 자괴감이 들고 부끄러웠던 것 같은데, 올 1월의 프랑스에서 나는 이렇게'라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내 모습에 많이 신이 났고 뿌듯했었다. 어쩌면 영어가 아닌 제2외국어이기에 스스로에게 보일 수 있었던 너그러운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유럽 여행 이후 연달아 이어진 이사와 전보 그리고 치과 치료 등이 모두 끝나고, 새로운 변화들에 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7월부터 다시 프랑스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6개월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수업을 듣는 시간이 주 중에서 주말로 바뀌고 함께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프랑스어에 대한 나의 흥미와 의욕은 여전하다. (프리다이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잘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더 커진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러던 8월의 어느 대낮이었다. 나는 노트북으로 무언가 일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공연 티켓을 제ㅣ예매하는 앱에서 보낸 광고 알림이었는데, 슬쩍 내용을 확인해 보니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의 프렌치 오리지널 공연 예매가 곧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텐데, '프렌치 오리지널'이라는 말에 눈이 확 떠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뮤지컬 제목을 다시 보다 보니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제목에 담겨 있는 'Notre'와 'de'의 의미를 전주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배웠던 것이 아닌가! 이 정도의 우연이 겹치면 이것은 운명이다는 생각에,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잠시 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프렌치 오리지널 공연을 예매했다(심지어 이른 예매여서 할인도 받았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한 달이 넘게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1998년 초연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 영상을 집에서 끊임없이 틀어 놓았다. 예매할 때는 몰랐는데, <노트르담 드 파리>가 송스루 뮤지컬(Song-through Musical)***이어서 노동요로 활용하기에도 딱 적당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모든 곡들을 다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모든 노래가 하나같이 다 좋은지(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쩌면 모든 배우들이 역할을 찰떡같이 소화하는지, 대체 이 명작을 왜 이제야 알았나 싶어서 땅을 치고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러다 내가 반복해서 보고 또 본 초연 영상에서 '프롤로(Frollo)'라는 주교 역을 맡으셨던 '다니엘 라부아(Daniel Lavoie)' 배우가 이번 내한에도 함께하셨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내한 공연일 수도 있다(다니엘 라부아 배우님은 1949년생이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1998년 초연 때부터 프롤로 역을 맡아 오셨던 다니엘 라부아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배우진의 컨디션에 따라 당일에 출연 배우들이 결정되는 관계로, 나의 바람은 사실상 하늘에게 맡겨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 결전(?)의 날이 9월 20일, 어제였던 것이다.
***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 없이 노래로만 구성된 뮤지컬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오늘의 출연진이 공지되는 캐스팅 보드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서, 그냥 공연이 시작되면 확인하자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던 터라 공연이 시작된 순간까지도 다니엘 라부아 배우님의 출연 여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프롤로 주교가 첫 등장을 하는 장면에서 왠지 다니엘 라부아 배우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는데(주교 옷에 딸린 모자 부분까지 뒤집어 쓰고 계셔서 정확하게 확인을 못 했다), 나중에 모자 부분을 확 뒤로 넘기시는데 다니엘 라부아 배우님의 백발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소름이 쫙 돋고 감격해서 눈물이 맺힐 뻔했다. 유튜브로 보았던 흑발의 40대 배우가, 백발의 70대가 되어 내 눈앞에서 여전히 풍부한 성량으로 누구보다 관록 있게 노래를 하고 계시다니! 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살아 있는 역사를 그 한순간에 마주한 듯했다.
심지어 내 자리는 우측 구역의 맨 앞 줄인 1층 E열 1번이었는데(일반적으로는 가운데 구역이 아니면 차라리 주요한 장면이 상대적으로 많이 펼쳐지는 좌측 구역에 앉으라고들 하는 것 같았다), 우측에서 다니엘 라부아 배우가 노래를 부르시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때는 무대 전체의 조망을 포기하고 다니엘 라부아 배우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감히 '다니엘 라부아석'이라고 명명해도 될 만한 자리였다고 자평한다. 나에게는 정말이지 최고의 자리였고, 그 자리는 나에게 최고의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어제의 공연이 아직도 기적같이 느껴진다. 내가 작년에 그 학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유럽 여행을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더라도 프랑스어 학원을 다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제의 그 감격과 전율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우연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적 같은 한순간이, 내가 프랑스어를 계속 공부해 나갈 동력이 되어 줄 것만 같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지금보다는 많이 향상되는 그 어느 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현지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에도 다니엘 라부아 배우가 연기하는 프롤로를, 프롤로가 단독으로 부르는 '파멸의 길로 나를(Tu vas me détruire)'과 '신부가 되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Être prêtre et aimer une femme)'****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꼭 그랬으면 싶다.
**** 이 글의 제목 역시 프롤로 역의 배우가 단독으로 부르는 뮤지컬 넘버 '신부가 되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차용하여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