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갈색 봄

by 솔라담




"아빠, 봄은 무슨 색깔이야?"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가 토끼 모양 사과를 우물거리며 묻는다.
"글쎄, 새싹도 초록색이고 개구리도 초록색이니까 초록색 어때?"라고 답을 하니, 자긴 초록색이 안 예쁘다며 자신의 봄은 무지갯빛이라고 한다. 아이의 말에 조용히 웃다가 생각에 잠긴다. 내게 봄은 어떤 색일까.

​봄 하면 떠올리는 색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벚꽃의 분홍, 누군가에겐 개나리의 노랑이겠지. 내게 봄은 연갈색이다. 지금도 날 설레게 하는 색. 우리 가족의 유독 검은 머리카락 때문이었을까, 찰랑거리던 그 아이의 연갈색 단발머리. 그 빛깔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이따금 그 아이의 얼굴도 얼핏 떠오르는 것 같은데, 막상 손을 뻗으면 스르륵 흩어져 버린다. 연갈색 머릿빛과 하얀 피부, 그것이 얄미운 내 기억의 한계다.

​ 같은 반도 아니었던 그 아이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파트에서도 현관문을 열어두고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대라서 그랬을까. 우린 이유도 없이 친해져 있었다. 누군가 거대한 핀셋으로 내 아홉 살 봄이라는 들판에 그 아이를 툭 심고 간 것만 같다.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찾아가던 기억이 난다. 전화도 없이 찾아가 벨부터 누르던,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 짝이 없던 아이. 주머니 속 손바닥만 한 초콜릿. 어머니가 아끼시던 장미 그림의 초콜릿을 몰래 들고 나와 페달을 밟던 순간. 이걸 건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 붉어지던 얼굴이 기억 속에 선명하다.

​ 맞벌이를 하던 우리 집과 달리 그 아이의 어머니는 늘 집에 계셨다. 느닷없는 방문에도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고, 항상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아주셨다. 평소엔 숨겨둔다던 게임기도 내가 갈 때면 꺼내주셨는데, 하루는 오리 사냥 게임을 하라며 총을 사 오셨다. 그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외동딸이었다. 총은 두 자루였는데...

​아늑하던 작은 방 안에서, 벚꽃비 내리던 공원에서. 봄바람과 꽃향기 사이로 찰랑거리던 연갈색 머리카락. 따뜻했던 하얀 손, 둘만의 웃음소리. 흐릿한 유년기 기억 속, 봄의 햇살처럼 반짝이는 조각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멀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다시 거대한 핀셋으로 뽑아간 것처럼.

그 뒤 3년 동안 우린 떨어진 채로 지냈었다. 난 왜 한 번도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그때의 감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딸아이가 자라면 물어보는 수밖에. 열 살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연갈색 봄은 6학년이 되어서야 다시 찾아왔다. 반 배정을 확인하고 어찌나 설렜던지. 하지만 막상 그 아이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복도 창으로 연갈색빛이 스치면 괜히 옆 친구에게 장난을 걸었고, 같은 조가 된 날은 애꿎은 지우개만 종일 비비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랬을까. 난 그 봄 내내 꺼내지 못했다. 가방 속 장미 그림 초콜릿을.


그 아이와 늘 붙어 다니던 친구 둘이 있었는데,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종종 해주었다. 그 아이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 무슨 라디오를 듣는지 같은 소소한 것들. 혹시 그 아이의 부탁은 아니었을까. 얄궂게도 그 둘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그 아이의 얼굴은 손에 닿기도 전에 흩어지는데...

​아홉 살 때는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던 아이가, 열세 살이 되어서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이후로 평생 나를 따라다닌 우유부단함은 아마도 그때 끈적하게 붙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가방 속 초콜릿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더웠던 어느 날. 그 아이는 전학을 갔고, 그렇게 나의 봄은 연갈색빛을 잃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여름방학 전에 전학을 가서 졸업앨범에도 없다지만,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동창들을 수소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찾지 않는 건, 그때의 망설임과는 결이 다르다. 흐릿한 기억 속 햇살 같은 조각들. 연갈색 웃음, 꼭 잡은 두 손, 둘만의 추억과 작은 비밀들...
곁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잠든 걸까. 아이가 남긴 토끼 모양 사과를 입에 넣는다. 달다.

이 아이도 언젠가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는 날이 올까? 혹은 나와 달리 용기를 내는 사람이 될까. 부디 ​이 아이의 봄은, 그래 무지갯빛이 되길 바란다. 좋은 꿈 꾸렴.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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