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야, 장희야!

by 솔라담



"장희야, 장희야!"


해가 뉘엿뉘엿한 초저녁 퇴근길. 사람들의 처진 어깨 사이로 들리는 어느 여인의 이름. 구슬픈 호명에 다들 떨궜던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린다. 거리의 한 복판에서 중년의 남자가 목청껏 한 여인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다.


“장희야, 대체 어디를 갔니 장희야!”


궁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애절한 사연을 품은 듯한 그 목소리에 이끌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남자의 대사는 슬그머니 변주되기 시작한다.


"장희야, 어느새 이것밖에 안 남은 거니! 장희 딸기 거의 다 나갔습니다! 이제 딱 다섯 박스! 지금 아니면 못 삽니다, 마지막 기회! 장희 데려가세요!"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실소가 터져 나온다. 흥미가 일어 한참을 지켜보니, 얼마 안 남았다던 다섯 박스의 빈자리는 매대 밑에 숨어있던 새로운 장희들로 어느새 채워져 있었다. 남자는 골이 든 사과를 하나 베어 물며 잠시 마른 목을 축이더니, 다시금 목청을 가다듬고 애절하게 장희를 부르짖기 시작한다.


도대체 장희가 누구길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주머니 속 만물박사에게 물어본다. 아, 장희는 외국의 공주님이었구나. '아키히메(章姬)'라는 일본의 딸기 품종. 처음 만든 이의 이름에서 '장(아키)'을 따고, 공주라는 뜻의 '희(히메)'를 붙인 말 그대로 '장 공주님'.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공주님이 한때 대한민국 딸기 시장의 화려한 옥좌를 차지했던 절대 강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로열티 문제와 개량된 품종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는 그 자리를 내어주고 밀려난 비운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 장희에게는 참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속으로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 오해했던 것에 심심한 사과를 건네며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로 다시 울려 퍼지는 그 이름이, 어쩐지 처음보다 구슬프게 들려온다. 장희야. 장희야!


참으로 기발한 상술이구나! 감탄하며 웃음 짓다가, 문득 시선이 닿은 곳은 과일 가게 바로 위층의 굳게 닫힌 창문이었다. 저 문을 닫은 것은 쌀쌀한 봄바람 일까, 불쌍한 공주님의 이름일까. 저 창문을 걸어 닫은 그 누군가도, 호객 수단으로 전락한 공주님 못지않구나. 오호통재라.


생각이 그곳에 미치자, 평소엔 무심히 지나치던 버스 정류장의 번쩍이는 광고판과 거리의 현수막들이 새삼스럽게 낯설게 느껴진다. 굳이 장희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원치 않는 홍보의 홍수 속에서 헐떡이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와서도 꼬리를 무는 상념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OTT의 광고야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최소한의 대가라 치자. 거리의 광고들은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내 일상의 시선과 정신을 일방적으로 빼앗아 가는 것일까. 나는 분명 실수로라도 '광고 수신 동의' 버튼을 누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보니 누군가는 인공위성을 띄워 밤하늘에까지 거대한 광고를 띄우겠다고 한다. 그 시대의 밤하늘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할까. 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 밤하늘은 자본주의가 도달해야 할 마땅한 종착지일까. 어쩌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방적인 시각적 폭력은 아닐까.


대학 시절 얼핏 읽었던 책이 떠오른다. 무슨 패커드였나, ‘숨은 설득자’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광고는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무의식을 조종한다는 내용.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고라는 거미줄에 걸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상 곧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들을. 그런 은밀하고 악질적인 함정에 비하면, 오늘 내게 짧은 웃음과 얄팍한 지식이라도 쥐여준 장희 아저씨는 차라리 낭만적인 양반이 아닐까.


온갖 잡념 속에서 씻고 나오니 딸아이가 품에 폭하고 안긴다. 우리 공주님. 아직 글자도 모르는데 방에는 온갖 전집이 한가득이다. 그나저나, 그 장희 아저씨는 과연 그 방식으로 쏠쏠한 벌이를 하고 있을까. 사실 처음에나 신기하지 다시 들으면 별로 효과 없지 않을까. 그 동네 월세도 제법 나가던데, 과연 사람들이 그런 뻔한 상술에 꾸준히 넘어가려나. 어쩌면 또 기발한 상술을 개발하려나.


한참을 내달리던 머릿속의 이어달리기는,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는 아내의 목소리에 의해 경쾌하게 끊어졌다.


"딸기 먹어. 아니, 집에 분명 딸기 잔뜩 있는데 대체 왜 또 사 온 거래?"


아내는 구박을 곁들였지만, 황송하게도 딸기를 곱게 씻어 내어 주었다. 나는 우리 집 공주님을 무릎에 앉힌 채로, 방금 사 온 장희 딸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 장희야. 장희야!

과연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을 만한 맛이구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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