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최종 목표, 내가 되고 싶은 최종 목표 찾기
배우 이정재가 아닌 감독 이정재의 첫 영화 ‘헌트’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올 때 처음 든 잔상은 ‘이만하면 꽤 괜찮다’였다. 배우로서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있는 배우가 새로운 영역을 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첫 연출작이라는 것과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각본을 수정했다는 것을 살펴볼 때 연출자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정재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 이만하면 그의 감독 데뷔는 성공이지 않을까?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서던 사람들이 카메라 뒤에서 연출을 하는 경우는 이정재 외에도 종종 있었다. 국내 배우 중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면 김윤석 배우의 연출작 ‘미성년’이 떠올랐다. 김윤석 배우는 각본을 쓰고 감독으로 연출을 하며 영화 미성년에서 주연 배우로 연기도 했다. 결말이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미성년’도 재밌게 봤고 감독 김윤석의 다음 연출작도 기대가 된다.
두 사례를 보고 몇몇 배우의 최종 목표는 ‘감독’이 되는 것 일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디자이너의 최종 목표는 어떤 게 될 수 있을까?로 연결되었다. 연기를 하는 배우가 좀 더 넓은 그림을 그리는 감독(연출자)의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디자이너의 확장 영역은 어떤 역할이 있을지 상상이 안됐다.
디자이너 친구들과 최종적으로 되고 싶은 목표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자주 듣는 대답은 ‘내 브랜드 차리기’다. 디자이너의 역할을 넘어 상품 기획과 마케팅까지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디자이너의 확장된 역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답변이 썩 크게 와닿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내 브랜드’에 대한 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회사를 다니면서 사소한 일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내 것’이라는 도장이 찍히면 나는 아마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스트레스로 가득 차 펑하고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얘기를 하면 언제까지 디자이너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힌다. ‘여자’와 ‘나이’라는 유리 장벽이 내 앞을 막고 있고 회사생활을 오래 하더라도 디자인 실무를 계속하는 게 아니라 관리자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다.
F&B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를 론칭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있었지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하지 못했다. 인지도 있는 브랜드 론칭은 최종적인 목표보다 작은 단계 일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시니어 연차에서도 이룰 수 있는 일이니까.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지인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일과 관련된 고민을 얘기하게 된다. 요즘 주된 주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음 경력과 연결 지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디자이너의 최종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여러 답변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조언은 ‘디자인을 베이스로 좀 더 넓은 영역의 업무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디자인을 한다는 실무에 집착해서 실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게 큰 의미가 없어!라고 느꼈다.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들여다보니 이게 바로 하나의 역할에 집중해 연기를 하던 배우가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감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조언을 듣고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시니어를 거쳐 오랜 시간이 흐르면 어떤 형태로든 커리어 전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디자인을 베이스로 다른 직무를 찾든, 디자인 팀에서 관리자가 되든.
너무 먼 미래의 일이지만 가끔씩 나만의 디자이너 최종 목표에 대해 이미지를 그려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 손을 꼽아 볼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전부 이룰 수 없지만 생각을 아예 안 한 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것 들 중 단 하나도 이뤄낼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