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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 Sep 05. 2022

현실감은 중요해

사진을 찍는 기록과 눈으로 보는 기록

핸드폰을 새로 샀을 때의 일이다. 마음에 드는 제품과 색상이 있어 핸드폰을 사야겠다는 결정은 쉽게 했는데 용량을 선택하는 부분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빠졌다. 512GB와 256GB 엄청난 크기의 숫자들을 나는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 그간 사용했던 전자기기들을 토대로 내가 필요한 옵션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했다. 4년 동안 사용했던 핸드폰의 용량은 32GB 중 27~8GB 정도를 사용했고 용량의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핸드폰에 뭘 넣고 다니길래 이렇게 큰 용량이 나오게 된 걸까 궁금했는데 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 맛집을 가서 밥을 먹거나 사진을 찍기 좋은 곳에 가면 가끔 들었던 소리에 정답이 있었다. 
“나 용량 부족하니까 대신 좀 찍어서 보내줘”
뭘 그렇게 많이 찍었냐면서 구경한 친구의 핸드폰 속에는 옛날에 찍은 오래된 사진도 있었고, 똑같은 물체를 구도만 살짝 다르게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었고, 이런 것까지 사진을 찍어야 하나 싶은 의외의 순간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사진첩이 꽤 간결한 편이다. 비슷한 구도, 느낌의 사진은 한 장만 남기고 다 지운다. 친구들과찍은 단체사진도 잘 저장하지 않고(친구의 생일이라던지, 결혼식 같은 중요한 기념일인 경우 제외), 셀카를 자주 찍지도 않는다. 
사진은 남기고 싶은 순간을 저장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핸드폰에 카메라가 생기면서 또 그 카메라가 성능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정말 중요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인상을 오랫동안 가져왔다.
재수를 할 때였는지 혹은 그다음이었는지 자세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EBS 수능특강 영어 지문에서 본 내용이 사진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꿔놨다. 
지문 속 남자는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해서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커가는 성장 과정을 전부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기록한 영상을 보는데 자신이 찍은 영상이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항상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이의 중요한 순간을 기록했기 때문에 잘 찍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고 정작 기억 속에는 그 순간이 저장되지 않은 것이다. 얘기가 진행되는 후반부쯤에 빈칸으로 밑줄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갈 문장을 맞추는 문제였다. 정답은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직접 눈으로 그 순간을 보는 것이 기록하는 것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였다. (정확한 단어는 생각이 안 나고 뉘앙스와 분위기만 적어본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실제로 이 말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연말에 어떤 가수의 콘서트를 갔는데 핸드폰 촬영이 가능한 순간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같이 카메라를 열어 무대를 찍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카메라 렌즈로 가득 찬 객석을 바라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오려고 힘들게 티켓팅 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카메라로 무대를 보는 거죠? 핸드폰 다 집어넣고 이 순간을 즐기세요! 눈으로 직접 현장감을 느끼세요!” 
말이 끝나니까 핸드폰을 넣어두고 직접 무대를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촬영을 잘하지 않는 나도 그 순간에는 무대를 찍고 있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라’는 말에 핸드폰을 넣어뒀다. 


시간이 또 한참 지난 요즘, 예전에 갔던 연말의 콘서트 장을 떠올려보면 구체적으로 무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대의 분위기가 어떤 느낌이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냈던 콘서트장의 열기, 노래가 좋았던 몇 개의 무대 정도만 어렴풋이 잔상으로 머릿속에 남았다. 아마 사진을 찍었다면 지금 말한 내용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순간을 기억하고 찍었던 사진을 보며 ‘그땐 그랬지’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찍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매 순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늘 하는 생각이 있다. ‘그 사진을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몇 번이나 볼까? 찍은 사진은 아마 다시 보지 않을 거야. 그대로 클라우드로 연결되어 가상의 저장공간에 기록으로 남는 거지.’ 한 두 번 다시 보기 위해 현장의 생생함을 놓치는 건 아쉽다. 시간이 지나도 볼 수 있는 사진의 ‘기록’ 보다 순간의 ‘현실감’이 내겐 더 중요하다. 


이렇게 살다 보니 핸드폰 속 갤러리에는 시간의 공백이 존재한다. 그 공백을 머리로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 이 부분이 조금 마음 아프다. 클라우드가 알려주는 ‘N 년 전 오늘’에서 머리로 기억하지 못한 듬성듬성한 구멍들을 발견하면 남아있던 기억의 끄트머리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다. 
새 핸드폰은 하루 정도 고민하다 사진을 많이 찍어서 용량이 부족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좀 더 큰 용량 512GB로 결정했다. 갤러리 속 시간의 공백을 전부 메꾸고 싶지는 않고 예전보다는 좀 더 촘촘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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