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with Audio
[그냥 아름다울 뿐인,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여자애가 말했다.
"너랑 사귀어도 되지만 조건이 세 개 있어.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되도록 짧게 할 것.
마지막으로 셋째,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지킬 수 있어?"
당시 나는 모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일상적인 것으로는 가짜로 고백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든지, 철학적인 것으로는 죽음이라든지, 시적인 것으로는 연애 감정이라든지.
그런데 모르는 게 하나 더 늘었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모르는 여자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응"이라고.]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은, 정말 좋아해서 감히 말하지 못한 감정의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랑이 진짜로 가능할까, 그리고 그 기억들은 잊히지 않아서 되찾고 싶어지는 낯익은 장면처럼 느껴진다.
일단, 내용 자체는 조금은 흔히 아는 '인소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학생 히노 마오리는 이지메를 당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가짜로 고백한 가미야 도루에게 조건을 내걸고 둘이 얼떨결에 사귀게 된다. 잠들고 일어나면 전 날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되는 히노는, 자신의 기억장애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하루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록한다.
그러나 도루는 히노의 비밀을 알게 되어버리고, 내일의 히노가 조금이라도 일상을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매일의 히노와 함께 하는 오늘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도루는, 히노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히노도, 도루도 사실은 서로에게 마음이 생겨버렸어도 이야기를 할 수 없어 답답해진다.
"셋째,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히노가 내건 그 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헤어져야 하기에, 자신과의 사랑은 오늘이 될 내일로 닿거든 잊더라도 히노만큼은 끝까지 행복하게 해주고 싶기에, 도루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못하고 삼킨다.
상대를 위한 희생이 곧 사랑일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도루니까. 그건 어쩌면, 말하지 않고도 그저 지켜보는 게 상대를 위함이라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릴지도. 하지만 나도, 언젠가부터는 '아프지 말았으면' '잘 지냈으면'이라는 소박한 말들이 사랑이 되는 사람이라서, 도루의 사랑의 방식을 조금씩 이해가 되는 걸까 싶다.
상대를 지키기 위해 말하지 못했던 감정은, 끝내 어디로 향하는 걸까? 도루는 그래서, 히노에게 그림을 권한다. 절차기억,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몸에 남는다"
즉 감각, 반복, 몸의 움직임에 남는 기억들은 기억이 아니라 감정의 흔적이라 믿고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으니까.
지나고 보면 누군가는 끝까지 조심스럽게 맴돌고, 내게 더 다가오지 않았던 이유를, 한참 뒤에야 알아버리는 순간을 안다.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일까.
다만 마주하는 그 순간의 공기, 눈빛, 이름을 부르기 직전의 입술이 떨어지는 호흡을 만드는 모양. 그런 것들은 잊히기가 어렵다.
어쩌면 사랑은, 말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을 가장 깊이 각인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책은 끝났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낼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