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다는 말. 그 말을 믿는지ㅡ (完)

31살의 12월. 칠 년 만의 해소.

by 도한솔 I Solar

그렇게 서른, 첫 30대. 2024년 되자마자 연극 뮤지컬 업계를 손 떼고 나와서, 처음으로 누려보기 시작했던 자유. 더 이상 어딘가에 종속된 형태가 아닌, 내가 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외롭긴 했어도 어쩔 수 없었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들이 있으니, 그저 계속 비웠고 나만의 것으로 채웠다. 혼자인 시간이어도 내 곁엔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0에서 1로 발을 뻗어 서른 하나가 된 나는, 2025년 한 해 동안 정말 수녀처럼 살았다. 성당과 도서관, 서점, 카페. 읽은 책만 해도 80권이 넘었을 듯하다. 사념, 또 사념. 진리를 찾아 헤매는 연금술사처럼 살았던 시간.




전날 담이 세게 와서 죽겠는 등, 어깨를 두들기며 (이때 신청했던 춤 수업이 취소돼서 진짜 다행이었다. 안 그러고 강행했으면 큰일 날 뻔.) 나는 카페에서 한해의 마지막을 성찰하다가 갑자기 공연과 영화표를 기록하는 어플을 켜서 뒤로 넘겼다.

2018년 12월 22일.
내가 그에게 첫눈에 반했던 그 시절, 너무도 스스로가 초라했던 나의 스물넷, 숨이 찼던 어떤 순간들. 스물여덟 이후 단발머리를 고수했던 내 머리카락은 일 년을 길어서 그때만치 긴 기장이었고 나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 그때 내 이름을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근데 생각을 해보니,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똑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이제 하루 뒤면 서른두 살(아무리 아직 만 나이로는 서른이라지만)이 될 텐데 계속 이런 후회나 할 건가.

아무리 책을 80권, 100권을 읽고, 내가 직접 만든 작품을 출품하고, 매일 죽어라 작업하고, 삶을 성찰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정작 시간은 한쪽으로만 흐르고,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내는 건 7년 전에도 했잖아? 자꾸 후회할 거야? 이게 네 자존심이야?




그래서 카페에서 급히 검색을 두들겼다. 우연처럼 그는 12월 31일이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후다닥 준비를 하고, 그가 공연을 마쳤을 2025년의 마지막 밤, 1월 1일까지 두 시간 남은 시간. 그 앞으로 그를 보러 갔다. 스물네 살의 내 마음을 들고, 공연장 앞의 공기는 영하라서 차갑고 볼을 긁어댔지만, 어쩌겠나 싶었지.


그리고 공연을 끝마치고 나온 뮤지컬 배우인 그가 나왔다. 7년 전의 그날도 그는 같은 공연, 같은 배역을 했었는데, 신예 시절의 그때와 달리 그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마스크까지 쓴 채, 피곤함이 역력한 '배우 모드'였다. 멀찍이 관객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관객으로서 퇴근길 같은 걸 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 씨?" 내 부름에 그가 멈춰 섰다. 누구냐는 듯한 경계 섞인 눈빛. 주저하며 인사를 건네고 7년 전 공연장에서 마주쳐 'OO이 친구'라고 소개했던 기억을 꺼내자, 의외로 그는 나를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반가움은 찰나였다. 이미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공연을 보지도 않고 대뜸 말을 거는 나를 귀찮은 팬 정도로 취급하며, 용건이 뭐냐는 식으로 까칠하게 굴었다.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혔다. 7년 전에도 샤이한 나를 느끼게 하는 그의 기에 눌려 고장 난 인형처럼 서 있었는데, 서른하나의 마지막 날에도 여전한 내 모습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헛웃음이 터졌다.

"우쒸... 진짜... 그때도 이래서 진짜 힘들었는데..."

내 반응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가야 하니 "아니, 무슨 일이신데요." 짜증 섞인 투로 나를 재촉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받거나 죄송하다면서 쪼그라들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퍼포머고 애초부터 팬으로 온 것도 아냐, 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7년 전의 내 진심을 쏟아냈다.




"저 다른 판에 있어요. 지금 이상해 보이는 거 알고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똑똑히 말했다. 7년 전 첫눈에 반해 1년 동안 혼자 좋아했다, 대학로에서 마주칠 때마다 유령처럼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서 이상해 보였겠지만, 이름조차 말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가끔 생각났었다,라는 말을.

제 이름은 도한솔이에요.


내일이면 서른둘. 문득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더 늦기 전에, 이 말하지도 못했던 아쉬움의 기억을 털어내고 싶었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시절 내가 그렇게 엄청 좋아했던 것도 본인이었다고.

그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겠으니 이제 가도 되냐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상관없었다. 아니, 뭐. 나는 당신한테 기대하는 게 있어서 온 것도 아녔고, 애초에 7년 전에도 나 같은 타입이 본인 스타일이 아닐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네, 입술이 뾰족하게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저도 가야 해요." 하고는 나는 준비해 온 것들을 그의 손에 툭툭 올려줬다. 내 전시 퍼포먼스 때 썼던 향수 <SILENCE> 샘플, 그리고 종교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축복의 의미로 주는 묵주 팔찌. 좀 더 곱게 줬어도 됐을 텐데, 그가 너무 까칠하게 나와서 나도 그냥 툭툭 털듯이 건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뒤로하고, 나는 먼저 발을 뗐다. 7년 전에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휙 앞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걸어가는 내리 생각했다.


"아니, 뭐 저리 까칠해? 자의식 봐.

기껏해야 2,3분도 안 되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워?"




오래 묵혀뒀던 환상처럼 예쁘지도, 무겁지도 않았던 순간들. 근데 어쩌면 그래서 다행이었을지도? 한해 마지막 일정 마치고 피곤한 사람 붙잡고 귀찮게 굴었던 건 미안하지만, 나한텐 본인이 배우님이 아니고, 그 시절의 바보 같던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말 좋아했던 어떤 남자였던지라.


스물네 살의 작고 초라하고 바보 같았던 나.

그랬던 내가 내 이름을 말하기까지 7년 하고도 9일이라는 시간의 허들을 넘어야 했는 걸. 그러니까 황당했어도 그쪽이 좀 이해해 주길.


2025.12.31 23시 즈음, 서른 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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