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아닌 작은 소녀가 무너뜨린 권력의 허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with Audio

by 도한솔 I Solar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하트여왕과 앨리스 재판 낭독


["아니야, 아니야! 처형이 먼저고, 평결이 나중이야." 여왕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도 안 돼! 처형이 먼저라니!" 앨리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입을 다물어라!" 여왕이 얼굴이 누르락붉으락해졌다. "싫어요!"
앨리스가 말했다.
"저 아이의 목을 쳐라!"
여왕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그러나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어쩐다고 신경이나 쓸까 봐? 당신들은 고작 카드 한 벌일 뿐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바로 이 순간 카드 전체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앨리스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겁이 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카드들을 쳐내려 했다. 이윽고 앨리스는 강둑에서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자신을 보았다.]





2년 여전, 나의 사랑하는 열여덟 살의 제자(그 여자아이는 현재 대학도 진학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는 나에게 '쌤, 백설공주 닮으셨어요!'라는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편견과 품평이라면 모조리 받아봤던 나의 삶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말도 없다.

글쎄, 나는 한평생을 공주라기보다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소녀처럼 살아왔거든.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입술은 피처럼 붉었으며,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검었다.'


19세기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 캐릭터를 설명할 때, 대부분 외모와 옷차림을 설명하곤 한다. 맑은 피부와 구슬같이 굴러가는 목소리, 선량한 성품.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은 다르다. 이 책에선 단 한 줄도 앨리스의 외모를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아이의 '기질'에 대한 묘사만 있을 뿐.


'호기심과 탐구심이 가득한'
'논리와 모순 사이의'
'아이 같은 순진함과 예의'


정해진 역할과 기존의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외모 묘사 없이도 호기심, 철학적 질문, 순수함, 도덕으로만 형상화된 주인공. 즉, 의식의 자유로운 모험을 하는 아이, 앨리스.


언제나 늦을까 봐 허둥대는 하얀 시계 토끼를 쫓아 토끼굴로 뛰어든 앨리스는,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를 이상한 나라에서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약 한 병, 빵 한 조각 먹었다고 갑자기 몸이 작아졌다가 커졌다가를 반복하고, 자신이 펑펑 흘린 눈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결승선 없는 레이스를 달리며 무의미한 경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이상한 존재가 된 앨리스에게 물론 조언자들 또한 있다.

태연히 물담배를 태우는 애벌레는 "너는 누구니?"라는 물음과 무심함을, 길을 잃은 앨리스에게 빙글거리며 웃는 입만을 남기곤 하는 체셔고양이는 "길은 네가 가고 싶은 데 따라 달라."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은 앨리스가 '앨리스다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조언이 된다.

물론 이 모든 모험은, 시종일관 앨리스 혼자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도전과 결단의 순간들이지만 말이다. 이윽고 모자장수의 영원히 오후 6시에 멈춘, 끝나지 않는 티파티에서 앨리스는 깨닫는다.

Unbirthday, 생일이 아닌 날.
삶의 축하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언제든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발상을, 그리고 축하도, 웃음도, 건배도, 모두가 반복될 때는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의미 없는 의식에 갇혀있을 뿐이라는 걸.

매일은 특별할 수도 있고,
매일이 허무할 수도 있다는 걸.


하트여왕과의 마지막 재판? 사실 자기 멋대로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만들고 휘두르는 하트여왕이 가진 건, 무서운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허세일뿐. 앨리스는 겁이 아닌 이성으로 그런 그녀를 직면하여 와르르 무너뜨린다.


권력이 공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여왕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니까. 앨리스의 말대로 카드 병정들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흩날릴 수 있는 '고작 카드 한 벌'일뿐이니까.

도대체 앨리스가 뭐가 무섭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앨리스가 대단한 힘을 가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앨리스가 한 건 아주 단순한 말 하나,


"싫어요."


하지만 그 작은 한 마디가, 거대한 가짜 권력을 무너뜨렸는 걸. 아니, 근데 어떻게 해? 이상한 규칙에 끌려다니면서 침묵해 봐야, 결국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나서 언니에게 자신의 꿈속 우스운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또 자신의 시간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녀일 뿐인 걸.


그니까 앨리스가 보여준 건 공주의 외모도, 화려한 마법도, 대단히 거창한 힘도 아니다.

호기심,
질문할 용기,
깨어날 결단.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선택하는 단순함.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지만, 나는 공주라기보다, 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소녀였지.




여담


좀 웃기긴 하는데, 29살 그때는 놀라울 정도로 감수성이 넘쳐흘러서 "OO가 나한테 백설공주를 닮았대!" 하며 집에서 새벽 내리 펑펑 울었다. (;) 사실 직업 특성상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에 외모 자존감이 오랜 시간 너무 많이 깎여 나갔었거든. 그 이후 흔들릴 것 같거나 마음이 좀 힘들다 싶을 때는 그 친구가 해줬던 말들과 함께 보러 나간 벚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단 한 사람, 내가 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은 그 애가 됐지.

너 역시,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소녀로서 살아가더라도 너만의 길을 찾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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