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나의 아이들도 부모가 원하는 노년의 삶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큰 아이 친구의 부모들인 동네 지인과 뜻이 맞았다. 서울에서 살지만, 그 당시 나를 포함해 주변 학부모들은 유기농 먹거리로 아이들을 키웠고, 자연스럽게 나의 키워드는 친환경, 기후변화, 로컬, 공동체 등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미 그 시절에 그런 이상을 실천하면서 시골로 귀촌이나 귀농하는 지인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만약 이 꿈, 시골에서 살기를 지금쯤 생각했다면, 아마도 나는 '5도 2촌', '시골 한적한 곳에 전세를 빌려서', '여행이나 자주 다닐까?' 등 적어도 집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자연스럽게 혼자서 시골살이가 아닌 지인들과 함께라는 말이 나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서울과 가까운 곳, 나의 아이들이 오고 가고 쉬운 곳, 시댁과 친정과도 거리가 적당한 곳을 찾다 보니 충청남도가 나에게 우연히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렇게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구나라고 말하겠지만, 단순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땅값이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고, 서쪽의 땅이라는 것도 나를 붙잡았다. 해가 지는 곳, 내 삶의 마무리를 맡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 함께 시작한 가족은 3가구였다. 큰아이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로 만나 지금까지 인생을 이야기하며 지내오고 있는 지인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2가구만이 집을 짓는다.
힘들게 3여 년 땅을 보러 다녔는데, 마지막에 1가구의 일정이 다르게 전개되어 빠지게 되었다. 지금도 함께 집을 짓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때 같이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그 가족은 얼마 후 경기도 화성에 물류센터를 짓고, 그곳 주변으로 이사를 했다. 한마디로 굉장히 멋진 일이 일어났다. 늘 감사하다.
성미산-어느 날
홍성군 홍동읍에 우리 땅을 마련하기까지 거의 3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땅을 보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의 짙은 노을은 이상하게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서울집에 와서도 다시 시골집을 지을 생각을 하니, 귀찮은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부동산과 땅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충청남도 홍성군 읍소재지의 부동산은 거의 섭렵했다. 아마도 함께하는 이가 없었으면 포기하기 쉬웠을 것이다. 시골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확신을 가지고 홍성 땅을 3년간 밟았다.
“어, 홍성은 아직 싼대”
우리가 만났던 첫땅에서 그만 땅값에 반했다. 당시, 양평이나 기타 웬만한 지역의 땅 한 평 값은 70~100만 원 정도였을 때, 우리가 만난 홍성의 그 터는 평당 15만 원 정도니 반할만했다.
비싼 이유와 싼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 시골살이하려고 내려가면서 땅값 상승률이나 교통의 편리함, 지역 발전 등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말해, 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도 땅도 다 임자가 있다고 했나, 2~3번을 내려갔는데, 어느 날 가축 냄새가 그대로 내 코로 들어오고, 땅 모양(3가구가 지을 땅)이 나오지 않는 등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쉽게 덤빈 우리는 새삼 공짜가 없음을 느꼈다. 그때부터 이곳저곳 그 부동산과 인연을 맺기 위해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그만한 땅이 있지 않았고, 여기구나 하는 느낌도 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러는 사이 나는 다른 부동산을 찾게 되었고, 홍성의 부동산이란 부동산은 거의 돌아보게 되었다. 아직도 처음 만난 부동산과의 인연이 안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땅임자도 따로 있지만, 부동산과의 인연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다가 우리에게 맞는 땅을 만나 여러 번 계약하기로 했지만, 번번이 계약이 파괴되었다. 우리가 계약하려고 하면 땅 주인이 다시 거둬들였고, 부동산에서 소개해 주는 땅들마다 좋았지만, 우리하고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고, 그만큼 지쳐갈 즈음 어느 부동산에서 괜찮은 땅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곳을 살폈다. 그리고 3가구가 살기 괜찮을 것으로 판단하고 계약하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미 15만 원대에서 시작한 땅 매매 가격이 평당 30만 원대까지 올라 있었다. 그만큼 마음도 여기 홍성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홍성의 지는 해를 끼고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는 시간이 아름다운 곳,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이제는 정이 든 홍성. 우리는 이제야 땅을 구하게 된 것을 반가워했다.
계약을 하기로 한 날, 우리는 약간의 기분 좋은 긴장감을 가지고 서울에서 출발했다. 아마 그때가 11월쯤일 거다. 큰아이가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기억이 난다. 부동산까지 대략 1시간여를 남기고 우리는 행담도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때 나는 집에서 가져온 따뜻한 커피를 가지고 차에서 내려 저만치 있는 간식 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 주차장 방지턱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무릎과 눈 바로 옆이 찢어졌다. 순간 아픈 것보다 혹시나 하는 불안함이 나를 덮쳤다. 지인들의 부축으로 서둘러 휴게소로 갔다. 약국에서 약을 사서 내 무릎에 바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계약하기로 한 부동산이다.
“ 여보세요.”
“ 어디쯤인가요?”
“ 네 시간 맞춰 갈 수 있습니다.”
“ 그런데, 30여 평의 땅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우리는 각자 이 계약이 잘못될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내가 넘어지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면서 들은 이야기가 부동산에서 계약을 앞두고 검토는커녕 1시간 정도를 남겨 놓고 땅 평수가 잘못된 것 같다고 연락이 왔으니 말이다. 그것도 계약 당사자들 모두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일 처리를 했다.
결국, 그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또 우리는 땅을 보러 다녀야 했다. 과연 시골에 가서 살 수는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2가구로 줄어들었고, 두 가구는 땅을 좀 더 작게 보기로 했다. 원래는 천여 평의 규모로 3집이 나눌 수 있는 모양이 나오는 것을 중심에 두고, 3가구가 함께 살 것이니까 땅 모양과 조용한 곳으로 땅을 보러 다녔었다.
그러다, 가구 수가 줄어들면서 시선이 바뀌었다.
2가구만 집을 짓게 되니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땅의 모양보다는 외롭거나 무섭지 않은 곳으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달라진 시선을 가지고 있는데 부동산으로부터 연락받아, 다시 내려가게 되었다.
아마 세 군데 정도를 더 봤던 것 같은데, 한 군데는 산을 깎고 지대가 높은 곳이었고, 한 군데는 밭으로 층이 나 있었다.
그리고 홍동면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홍동은 가축냄새와 땅값이 비싸다는 소리를 듣고 근처 아예 가지 않았다.
홍동면에 있는 이 마을을 보는 순간, 이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5월이라, 하늘과 땅도 싱그럽고 초록빛의 넓은 밭은 평지로 남향을 향해 있었고, 무엇보다 가축냄새도 나지 않았다. 내 시야는 그저 저 멀리 트인 남쪽으로 풍경만 들어왔다.
그곳은 또한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 주변에 풀무학교도 있고, 의료생협과 도서관 등 소위 인드라망의 세상이라 여러모로 개방적이고 외롭지 않아 보였다.
지인과 나는 두 군데를 염두하고 고민하였다. 전화 너머 남편에게도 물어봤다. 흔쾌히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땅을 찾아 3년의 시간을 발품을 팔았다. 발품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