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람 May 08. 2023

나의 할머니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 몇 편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 몇 편

홍성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나 나름대로 타당성을 찾다가 '왜' 가는 걸까에 대한 물음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물음에 고민하고 고민했다.




지나온 기억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잊힌 기억, 모난 기억, 슬픈 기억, 숨기고 싶은 기억, 부끄러운 기억, 멍든 기억, 모진 기억들이 가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어떤 날은 저 기억이, 어떤 날은 한 번도 꺼내 보지 못한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오늘, 이 순간을 되짚어 주었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조차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의 삶,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생살이 등 시간이 만들어 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춤춘다.


어느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할 때가 많았다. 한 시대를 겪었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의 이야기는 가슴은 저렸지만 가슴에 와닿지 않았고, 내가 겪지 않았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여하튼 무의식이나마 아마도 그랬을 거라는 추측으로 이야기를 풀자면, 철물 장사를 하던 엄마는 잠시 나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는 외할머니댁으로 보냈는데, 낮 동안은 잘놀다가 밤만 되면 어린 나는 서랍에서 옷가지를 챙겨 할머니를 붙잡고 울면서 집으로 가자고 조르다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고구마를 삶아 머리맡에 둔 기억이 저절로 떠오른다.

거기에는 내가 만들어 낸 상상도 포함되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그저 그 기억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우리가 경기도 문산에 자리를 잡은 것도 외할머니의 집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당시 시댁이었던 경상남도 산청에서 자기 고향인 대동강 평양시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까지 가기 위해 판문점 근처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고향을 늘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문산은 판문점과 가까운 곳이고, 통일되면 한걸음에 집으로 갈 수 있는 동네다.


머나먼 경상도에 시집을 가게 된 할머니는 27살에 혼자가 되었고, 딸 셋을 데리고 여기까지 혈혈단신 올라온 것만 봐도 고향으로 곧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셨던 것 같다. 끝내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지만, 눈물보다는 억척스러운 모성으로 인생을 사셨다. 여자 혼자 살기가 지금도 살얼음판인데, 그 험한 시대를 겪으면서도 견고하고 강인하게 딸 셋을 악착같이 키웠다.


그리고 내가 자란 곳은 미군 부대가 있는 동네다. 버스 정류장 앞에 시장이 있고, 도로를 가운데 두고 미군들 술집이 그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 당시 우리 동네는 한마디로 잘 나갔다. 시장경제가 기지촌 중심으로 움직였고, 지역 주민들은 그곳에서 나오는 일들로 밥 먹고 살았다.



출처 : 클립아트코리아




미군 점령하에 생긴 어둡고, 암울한 곳인 기지촌이 나의 고향이다.


미군 부대는 우리 집 앞에서 3분만 걸어가면 있다. 주민들의 밥줄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되어야 할 곳이다. 이곳 주민들의 자식 교육열은 전국에서 빠지지 않았다. 내 자식만큼은 여기서 밥 먹고 살지 말고, 서울 땅에서 남보란 듯이 살기를 원했다. 나의 부모도 그렇게 기지촌이 아닌 해방된 곳에서 우리를 키우고자 했다.


군부대에서 일하는 분,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우리 동네 모습이다. 희한하게 지금도 그 시장 근처만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존재한다. 마치 오래된 과거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나의 어릴 적 '**시장'은 사람 사는 곳이었다. 중국집, 구멍가게, 채소가게, 신앙촌, 편물점, 그릇, 정육점, 생선가게, 약국, 문방구 등 없는 게 없는 아주 정겹고 친한 이웃들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하던 철물 가게 이후 거의 50여 년 동안 채소와 양념을 파는 '명신이네'가 있었다. 그곳 어르신은 가끔 들렀을 때 나를 알아보셨고, 내 이름을 기억하면서 불러 주었다. 그럴 때면 마음 한편이 짠하고, 행복했다. 얼마 전 그분마저 장사를 그만두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나이 들어 지치고 쓸쓸한 곳으로 남아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주변은 어느새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기후변화로 눈도 예전만치 내리지 않지만, 해가 남들보다 일찍 지고 겨울이 먼저 와서 눈이라도 내리면 낮고 조용한 마을에 산타가 루돌프 사슴을 타고 마을 지붕에 쌓인 눈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면서 선물을 줄 것 같이 풍경만큼은 아름다웠다.


우리 부모님이 하던 철물 가게 이후 거의 50여 년 동안 채소와 양념을 파는 '명신이네'가 있었다. 그곳 어르신은 가끔 들렀을 때 나를 알아보셨고, 내 이름을 기억하면서 불러 주었다. 그럴 때면 마음 한편이 짠하고, 행복했다. 얼마 전 그분마저 장사를 그만두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 여기면서 인생을 사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공짜가 없는 세상, 이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내 앞에 있는 인생.


우리 부모님은 사거리 시장 맞은편에서 오랫동안 여관을 운영하셨다. 철물점 이후 편물 가게 등을 하시다, 여관을 운영하셨다. 나는 6학년 2학기 때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울로 보내졌다.


서울에 사시는 친할머니댁으로 유학을 온 그날부터 나의 서울 적응기가 시작되었다. 더욱이 우리 친할머니댁은 녹번동 높은 지대에 있는 지하가 깊은 곳에서 사셨다.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아득하다. 시멘트 계단을 딛고 한참을 내려가야 할머니 집이 나왔다.  그곳에서 고모 세 명, 삼촌 두 명, 그리고 나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다. 그다음에는 응암동 산 4번지 아주 높은 곳에 사셨다. 녹번동 소방서 건너편 골목으로 올라가다 보면 밭이 나오고 또 그곳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판자촌 집이 나왔다. 난 그곳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중학교 2학년쯤 때까지 보낸 것 같다.


우리 친할머니 할아버지 댁은 가난했다.


사실,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꽁보리밥을 고봉으로 먹어도 마냥 즐거웠지만, 나는 문산 엄마 품이 늘 그리웠다. 어찌 되었든 이리저리 높고 낮은 곳으로 이사 다니면서 철없는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다, 자기 집에서 잘살고 있는 외할머니가 엄마의 애원에 못 이겨 서울로 왔다. 나의 엄마는 기지촌에서 자식을 키우기 싫어했다. 사람은 서울에서 배워야 한다는 집념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자식들이라도 해방되길 원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할머니의 인생은 그날부터 달라졌다. 그리고 나와 할머니의 관계도 달라졌다. 서울에서 손주를 키우게 된 할머니와 우리 남매는 그렇게 서울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우리는 녹번동 산 중턱에 위치한 단독주택에서 셋방살이했다. 쪽방에서 할머니, 나, 남동생, 여동생이 함께 살았다. 막내가 이때 왔는지 아니면 조금 후에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쪽문이 있고, 그 쪽문을 열면 깊은 부엌이 나온다. 그리고 쪽문에서 한 계단 내려와 왼쪽 단차를 다시 올라가면 우리 방이 나온다.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나이에 나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마마를 앓았고, 엄마가 그리워 치과도 문산으로 오고 갔다.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살았지만, 당연했던 시절이라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반지하, 폭이 좁은 기다란 집 등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땅 뒤에 무덤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