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람 May 16. 2023

역마살이 있는 거라면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 몇 편

태어난 곳에서 성장하고 그 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평생을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면, 나는 아닌듯하다. 돌고 돌아 고향으로 다시 왔다.


 

깊고 깊은 인생 골짜기에는 청춘이 있었다. 그 청춘은 부산이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청춘의 끝 무렵 IFM 사태가 거침없이 나를 덮쳤다. 결코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허우적대는 나는 부산을 떠나야 할 명분을 찾았다. 내 인생이 또다시 대이동을 시작했다. 외할머니처럼 연어처럼 고향으로 다시 올라갔다. 떠날 때는 빈손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남편과 큰아이를 품에 안은 채 문산에 도착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 중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글을 쓰고 싶다.”


 

왜 이 말만 기억에 남는지는 모르나 그 말이 주는 타당성을 붙잡고 싶었을 것 같다. 치밀하게 준비하여 가출을 강행했다. 한마디로 사서 고생이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 취직도 하고 한마디로 잘나가는 사회초년생인 나는 부모와 가족들의 현실적인 울타리가 견디기 어려웠다.

누구나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결코 나는 평범하지 않았다. 잘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고 떠났다. 나는 부모로부터 해방을 인생의 화두로 삼았다.


그 시절만 해도 다 큰 여자가 세상 밖으로 나가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 어려운 것을 나는 과감하게 감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영웅심이고, 천상병 시인처럼 귀인이나 된 듯 우쭐대던 스무 살 시절이다. 과시 욕구, 잘난 맛, 허세였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정말로 집에서 도망치듯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무모하다.


그때부터 우리 부모는 나로 인해 하루라도 맘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으로 하루하루 보내셨다. 불효막심한 딸이다.

밤 11시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새벽 4시쯤 내렸다. 짙고 깊은 비릿한 냄새가 나는 부산역은 그 어느 때보다 염세적이다. 나의 이십 대에 면죄부를 주듯, 부산은 나를 붙잡았다.




솔바람- 봄을 담아 본다




부산은 젊었고, 나는 열정적이었다. 거기다 무모하다. 그곳에서 나는 지치지도 않은 채 16여 년 동안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사연도 많고 이유도 많았지만, 책만큼은 이고 지고 다녔다. 버릴 수 없는 것이 책이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오만한 지적 욕구. 그것을 버리거나 쓰레기통에 넣는 순간, 나는 이 부산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듯했다.

19살 때부터 박스에 책을 넣고 묶는 작업을 수없이 했는데, 나의 손목은 일반적이지 않게 매우 약하디약했지만, 이삿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했다. 아쉽게도 끝까지 요령이 생기지 않았다.


 

라면상자에 짐을 구겨 넣고, 부산 곳곳으로 이사를 했다. 한 번은 하루 만에 두 번이나 이사를 한 적도 있다. 그 당시 내 주변에 노동운동을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여차해서 나와 그 언니가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짭새(경찰)들이 언니를 감시한다고 해서 나는 이삿짐을 교회 장로님 댁 창고와 옥상에 풀어놓고, 감시망을 피해 이사를 했다. 어렸지만, 나는 그 언니가 너무 대단해 보였고, 지극히 내가 자취한다는 이유로 그 언니와 잠시 같이 살게 되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이사를 밥 먹듯이 하면서 16년을 살았다. 그러다 IMF 사태가 일어났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디자인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IMF는 우리를 부산에서 아주 쫓아냈다. 큰아이가 태어나던 그해의 암울한 상황은 아찔하다. 혼자서 이사를 다니던 청춘의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나는 산후조리를 끝내자마자 일하러 부산대학교까지 간 적이 있는데 정말 다리가 퉁퉁 붓고 몸이 엉망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일거리가 없어졌다. 남편과 나는 일하면서 아이를 안전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맡길 곳을 찾지 못했다. 그때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가고 싶어졌다. 남편은 서울이라는 곳에 아는 이 하나 없었지만, 나의 간곡하고 절박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남편도 나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서울로 입성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추운 겨울 2월, 친정집인 문닫은 여관 끝방으로 이사했다.


 

집을 옮기게 되면 삶의 터전이 바뀌게 된다. 나의 젊은 시절은 사서 고생을 했고, 이제 서울로 올라왔다.


청춘의 시간은 열정이었지만, 외로움이었다. 역마살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착하지 못한 채 머무를수록 가슴의 멍은 더 커졌다. 어쩌면 IMF를 핑계 삼았는지 모른다. 너무 지친 상태에서 아이를 낳으니, 내 날숨과 들숨을 쉬게 하고 싶었다.

부모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절실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