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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Jun 05. 2023

지속 가능한 삶

봄담을 위한 칸타빌레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나는 무던히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나의 인생은 수없이 흔들리는 과정이었고, 고독한 시간도 많았다. 삶이라는 긴 여정을 걸어가기는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오늘이 오늘이 되는 그 과정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봄담에서 나의 삶은 다시 한 번 지속 가능한 삶을 찾아야 한다.




소란에 상처받지 않을 나를 위해


마음의 평화는 늘 작은 소란에 급물결친다. 무서운 파도가 칠 때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지나가는 반면 아주 작은 소란에 나는 온몸이 떨린다.

그런날, 돌아서서 후회하지만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그럴때마다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극도의 진정제가 필요하다. 결국 나의 인생은 진정제를 찾는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혼이 거칠어 질 때 나의 현실은 더 험해서 헤쳐 나가기 어려웠고, 나는 점점 아팠다.


영혼의 공간이 있어 그곳만큼은 나의 영원한 진정제가 되기를 원한다. 소란이 일어날 때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베푼 것에 대해 돌려받고 싶을 때가 있다. 역시 나의 품성은 딱 거기까지인 것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어느 부분은 상처가 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인생을 산다.



솔바람 찍음 - 제주의 사려니숲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고, 나누면서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지만, 자본주의에 사는 자본주의적 인간이다 보니 마음의 욕심이 있다. 상처받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는 기대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주고받는 give & take 물질적인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를 주니 너도 하나를 주어야 하는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삶이 거시적으로는 굉장히 피곤한 것이고 미시적인 것은 관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관계는 '소통'이다. 마음이 맞으면 서로 소통해야 한다. 소통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지쳐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꺼이 내준다는 것은 그와 또는 집단과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이다. 나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으면 바로 넘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경계를 둔다. 서로가 반응하면서 인간관계도 공적인 일도 해야 한다.

소통은 배려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성향 자체가 너무 세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왔다. 그 말은 내가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한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결국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남에게 준 상처가 더 크다. 

내로남불인 셈이다. 우습지만,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상처 주지 말고, 받지 말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람인지라 이 말이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나이 들어가니 조심스럽게 나의 상처만큼 남의 상처도 보인다. 어쩌면 너무 늦은 반성일까? 하지만, 갈 길은 멀고 이 상황이 맞는다고 생각되어 바로 몸과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만남은 좀 더 따뜻한 삶을 지향하는 관계로 만나고 싶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관계는 지속된다. 기꺼이 내주는 관계라도 갈 길은 멀고 완벽한 소통과 배려가 되는 인생은 없다. 다만, 짝사랑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적어도 내가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겠다는 나의 생각이다.


살아오는 동안 많은 상처를 받았고, 상처를 입혔다. 너무 슬퍼서 온몸이 깨지는 듯한 적이 있다. 영혼의 상처, 그것은 나를 갉아 먹었다. 상처가 아물어서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남는다.



봄담에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한다. 기븐앤테이크의 삶이 아니고,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의 기브만 하면 된다.




조용한 상처


나의 이마를 비껴간 햇살

전율하는 상처


나에게로 온 통증이

비로소

반응한다


얕보고 햝키고 물어뜯겨서

존재했던 흔적이 사라질 즈음

나는 칼바람 앞에서


이유를 찾는다.


묻어 버릴 것이다.


지독한 기대





봄담을 지킬 몸


몸이 예전만치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면 여지 없이 나이 들어간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주변의 어르신이나 아는 지인들이 아파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아프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나의 몸은 그다지 착하게 살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나쁜 것이 맛있고, 해볼 만한 것들은 일종의 모험이 존재했다. 경계를 넘어설 때 오는 희열도 있었다. 나는 몸에너지와 정신에너지를 거의 바닥이 날 때까지 쓴다.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은 좋으나, 가끔 나를 보살피지 않고 쓰다가 쓰러진 적도 있다.


시골로 가는 것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아마 나의 몸이었을 것이다.

나의 삶을 통째로 집어 먹을 만한 아픔을 겪었지만, 사실은 그 시간만이 나를 온전히 쉬게 해 주었다. 아파서 몸과 영혼이 깨져버렸던 그 시간 나는 참 느리게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암투병하는 동안 나의 인생은 마침내, 잠시 쉬었다. 그 쉼이 나를 조금씩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살아왔던 시간. 달리고 넘어져도 달리기만 한 인생이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친정이든 넓게는 민주주의 든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

아프고 나서부터 나는 그 욕심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그 오만한 고집과 자만심이 내가 쓰러지는 데 한몫한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 내가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진다. 맞다. 맞지만, 좁게는 남아 있는 나의 아이들과 남편이 있으며 내 가족이 있다.

그들의 삶이 멈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은 나의 존재론에서 한발 물러나 비로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

순간순간, 몸의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덧없이 그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지속 가능한 삶이란


오늘도 존재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있음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 평화를 꿈꾸지만, 지독히 인간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에 끊임없이 싸움을 걸고, 서로의 권력 쟁취를 위해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살아간다. 하나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로부터 할 수 있는 작은 것들, 그것은 내가 봄담에서 내 몸과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직영건축으로 집을 짓는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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