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추석 달은 어떨까?

by 허영회

추석은 말 그대로 가을 저녁이다. 한자 중추절(中秋節)은 초추(初秋)도 만추(晩秋)도 아닌 가을 한가운데란 뜻과, 일 년 중 달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월석(月夕)이 합쳐져 추석이 되었다. 한가위란 우리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추석이란 단어가 더 좋다. 시골서 자란 유년기에 통통하게 차오르는 달을 보며 추석을 손꼽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좋아하는 유과와 세뱃돈이 있는 설날보다, 추석이 훨씬 기분 좋은 명절이었던 건 보름달 덕분이다. 달을 바라보노라면 미지의 세계로 그리움이 두둥실 부풀던 시간. 어둠을 밝혀주는 달밤은 바깥에서 길게 명절 기분을 연장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시골 설날은 어두워지면 명절 기분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낮이 짧아서 겨울이 싫다는 지인이 있다. 바깥나들이에서 보고 즐길 시간이 여름보다 줄기 때문이란다. 어른이 되어서 들은 말인데도 공감 백배라 웃었다.


결혼 후에 추석 보름달은 지워졌다. 큰며느리로서 명절 차례상 차리기 의무와 책임에 급급해서다. 대청소부터 시장보기 음식하기 손님 맞기 뒷정리는 며칠에 걸친 일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개똥철학이지만 힘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부터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37년을 지내오던 차례를 없애도 마냥 편하지만 않았다. 새로운 손님으로 큰아들네의 손자와 며느리 맞을 음식을 해야 하니까. 그동안 힘들었던 건 차례상차림만 아니라 모성 이데올로기도 한몫했지 싶다. 올해는 아들이 집에 못 온다고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인 천안에서 만나자고 한다. 처부모와 일본으로 여행을 가니 미안해서인지 우리와 시간을 먼저 보내자는 뜻이다. 천안에 있는 작은아들 집은 좁다고 아산에 펜션을 2박 3일 예약했단다.


연휴 첫날 3일 아침, 손자 반찬과 밑반찬 과일을 싣고 아산으로 출발했다. 돌아오는 길에 거창 친척 집과 진주 공원묘원을 찾을 계획이라 자동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고속도로 상황은 쭉쭉 달릴 만큼 좋았고, 들판은 연두와 노랑으로 어울린 벼가 익어가고 있다.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다. 소풍 가는 기분, 아니 소망했던 추석이다. 남쪽 구석 부산에서 중부지방으로 나들이라니 기분이 들떴다. 체크인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서 주변 식생을 돌아보고 싶었다. 제법 큰 이층 벽돌집 마당에 주차를 하자 주인이 맞아준다. 실내에 들어가지 않고 텃밭 작물과 꽃밭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큰아들네와 작은아들이 같이 왔다.


이제부터 나는 손자 케어 담당이다. 때에 맞춰 밥 먹이고 같이 놀아주면, 그들은 휴식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내 아들을 위한 엄마의 역할을 자발적으로 떠안는다. 세 남자가 거실 옆에 설치한 캐노피 아래서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술상을 준비한다.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기에 집 안에서 놀았다. 창밖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같은 자리에 앉아있지 않아도 짐작되는 분위기가 좋다.

내가 데리고 같이 잔 손자는 새벽에 기상했다. 새로운 환경에 놀고 탐색할 거리가 좀 많아서일까? 여전히 먹구름으로 하늘은 낮고 공기는 상쾌하다. 바깥으로 나섰지만 모래놀이에 빠진 손자가 이동을 거부한다. 우리가 머무르는 집을 “마당집”이라 부르며 멀리 가기를 불안해했다. 젊은이들은 아점을, 손자와 우리 부부는 이른 점심을 또 먹고서 펜션 앞 외암민속마을로 산책을 나섰다. 노랑노랑 벼가 고개 숙인 들판 길을 걸어보기가 얼마 만인가?


가족 여행 일정을 마치고 작은아들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큰아들네는 서울로 가고 우리는 아파트 단지를 돌며 산책했다. 축축하게 젖은 고층 아파트 숲은 하늘을 볼 여지가 없다. 이튿날 거창으로 향하기 전 아산만방조제에 가보자고 했다. 자동차로 먼 곳까지 왔으니 그 유명한 삽교천을 보자고 했더니 순순히 응한다. 사전 조사 부실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갯벌만 바라보았다. 서해안을 바라보는 시간이 오전 시간대라 아쉽다. 수목원 한 곳은 꼭 가보고 싶어 검색한 곳이 ‘화수목원’. 개인이 운영하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거리가 가장 가깝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운전사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에 걸맞게 아기자기 꽃으로 단장한 식물원 느낌이다. 꽃은 예상대로 원예종이 많아 눈요기에 좋은 맛이다.


거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구간별로 정체가 심했다. 국도와 고속도로를 번갈아 탔듯이 비도 오락가락하는 날씨다. 네비는 네 시 도착이라 예정했는데 다섯 시가 넘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밖에 나가보지도 못했다. 이튿날 진주 공원묘원을 거쳐 집에 오는 길도 구간별로 가다 서다 했다. 차가 바뀌고서 운전하기를 겁내다 보니 남편이 독박 운전사가 된 셈이다. 내가 편하고 좋아진 만큼 남편이 감내한다. 수목원 안에 있던 카페에서 남편이 며느리와 주고받은 카톡을 보여준다. ‘마나님은 우아하게 커피, 나는 물’. 두 분 데이트 잘하라는 말에 ‘나는 운전기사, 머슴’이란다. 39년 만에 가장 편하게 누리고 즐긴 추석인데 무언가 허전하다. 소망했던 방법으로 추석을 보냈는데... 그래 바로 보름달 부재! 구름이 장막을 치고 지짐거리는 비 때문에.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앞이 훤히 트여 들판이 내려다보이던 펜션에 달이 떴더라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달을 보면 그 어릴 때처럼 감정이 부풀어 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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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션에서 외암민속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아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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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에서 눈 덮인 산이 아름답다는 설화산을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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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25년을 지켜보는 펜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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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만 방조제 앞에서 유턴을 하고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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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쑥부쟁이 제방 너머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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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화수목원 추석날 기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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