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죽매의 상징과 돈의 속성
지갑 속에 현금이 있나요? 연령대에 따라 대답이 다르겠지요.
토요일 저녁에 진행하는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아들이 현금을 빌려달랍니다. 축의금으로 낼 현금을 미리 준비 못했다면서. 현금 없이 생활하는 젊은 그들도 축의금 봉투 속엔 지폐를 넣는구나 싶었습니다. 평소 지폐를 보지 않는 그들은 지폐의 도안 내용을 알고 있을까요?.
인물 초상으로 지폐를 구분하면 되지, 그 외를 알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의 지폐에는 송죽매가 빠지지 않고 있답니다. 소나무는 천 원권과 만 원권, 대나무는 오천 원권과 오만 원권, 매화나무는 천 원권과 오만 원권에 있답니다. 지폐 속의 송죽매 값은 소나무 11,000원, 대나무 55,000원, 매화 51,000원으로 대나무가 제일 비싸답니다. 화폐 도안은 국가의 역사적 특징과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기준을 거쳐 선정됩니다. 엄중한 선정 기준에서 예외 없이 송죽매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요?
송죽매(松竹梅)는 세한삼우(歲寒三友)로 겨울이 되어야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소나무의 사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는 굳센 기상, 대나무의 곧은 지조와 매화의 고결함은 추위에 꺾이지 않는 절개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고결함을, 현실적 이익보다는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전통 사회의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천년을 이어온 선비 정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실용적인 도구에 있으니 묘한 역설입니다. 정신적 가치의 상징이 물질적 교환 매개체를 장식하니 아이러니합니다만, 우리 사회가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려는 의도로 읽어봅니다.
소나무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변치 않는 가치와 절개를 표상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소나무의 불변성은 화폐의 안정성과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화폐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화폐는 환율의 변화와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를 서서히 깎아냅니다. 전통이 추구했던 절대적 불변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대적 안정성으로 변모합니다.
대나무는 유연함과 군자의 품격을 표상합니다. 곧은 줄기와 속이 빈 특성은 군자의 기개와 유연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대나무의 유연성은 현대 경제의 특성을 잘 반영하지요.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자본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흘러갑니다. 대나무가 눈의 무게에 꺾이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기며 살아남듯 현대의 경제 주체들은 변화에 적응하며 생존합니다. 여기서 대나무의 지조는 경직된 원칙 고수가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잃지 않는 핵심 가치로 재해석할 수 있지요. 내면을 비움으로써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얻고 유연성으로 시장경제에 적응하며 돈의 순환과 올바른 사용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매화는 희망과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이른 봄,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자태에서 불굴의 의지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매화는 설중매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눈 덮인 가지에서 홀로 피어나는 매화는 시련을 받아들이며 굴복하지 않는 선비 정신의 화신이었습니다. 퇴계 선생님의 유별한 매화 사랑이 천 원 권 지폐에 남아있죠. 추위에 굴하지 않고 향기롭게 피운 꽃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인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른 맥락으로 읽힙니다. 가난을 이겨내는 정신력의 상징이 아니라, 경제적 풍요를 약속하는 희망의 상징으로. 돈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더 많은 기회를 꿈꾸지요. 매화가 상징하는 희망이 이제는 물질적 성취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청빈을 미덕으로 여겼던 매화가 부의 증식을 돕는 도구 위에 새겨진 것이지요. 매화의 고결함은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하던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자립하여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모습을 그리게 합니다.
전통 사회에서 매화의 인내는 감내(甘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주어진 시련을 달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정신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었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화의 인내는 투자의 개념으로 변모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참는 것은 미래의 더 큰 보상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창업가가 초기의 손실을 감수하는 것, 직장인이 승진을 위해 야근을 하는 것, 학생이 성공을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것. 이 모든 현대적 인내는 매화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 목적은 정신적 완성이 아닌 물질적 성취로 바뀝니다. 매화의 인내가 자본주의의 지연된 만족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매화가 상징하는 희망이 이제는 물질적 성취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는 전통 사회의 가치관과 현대 자본주의가 충돌하는 지점이자, 동시에 융합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지폐 위의 매화는 이러한 현대인의 복합적 욕망으로 읽힙니다.
송죽매가 새겨진 지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전통적 가치와 자본주의적 실용성을 양립할 수 있는가? 지폐 위의 송죽매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전통의 가치를 완전히 버리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 제3의 길을. 소나무의 불변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 대나무의 유연성을 통한 적응, 매화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미래 지향성. 이 세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물질과 정신, 전통과 현대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옛것의 향수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희망이 함축된 상징으로. 전통과 현대성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치, 그것이 지폐의 송죽매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지폐의 송죽매 도안은 단순히 돈이 아닌 삶의 태도를 묻습니다. 지폐를 쥐는 우리에게 돈을 최고의 하인으로 삼고 최악의 주인으로 삼지 말라는 베이컨의 교훈을 되새기게 합니다. 지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세한삼우의 정신을 통해 우리에게 어려운 시대일수록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를 지니고 있는가,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이 머무는 곳의 뒤 배경을 맡았던 병풍 일월오봉도(日月五奉圖)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고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리란 뜻을 담은
해와 달, 산과 물, 그리고 소나무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의 오죽
이정의 풍죽도를 뒤에 두고 앞 그림은 어몽룡의 월매도
퇴계의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에 물을 주라" 였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