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절제를 배우게 된다.
언제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익혀간다.
하지만 그 절제를 절제로 가르치지 않고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절제가 아니라 통제가 된다.
나도 그렇다.
나는 절제를 잘 하고, 정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건 절제가 아니라 습관화된 자기억압, 곧 통제였다.
어릴 때, 나는 말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을 좋아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입을 여는 게 두려워졌다.
“말하기 전에 세 번은 생각해.”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아마 그 말이, 지금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된 첫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의 나는, 부모가 곧 세상이었고 어른들의 말은 진리 같았다.
그러나 ‘쓸데없는 말이 많다’며 혼난 기억들이 쌓이면서,
나는 점점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 스스로 침묵을 택하는 나이가 도달했을 땐, 왜 이제는 신나게 조잘조잘대지 않느냐고 했다. 세 번씩 생각하고 말하라며..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건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일곱 살, 여덟 살 아이가 무슨 대단한 말을 했다고 ‘쓸데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그 후로, 나는 어떤 말을 하기 전마다 머릿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게 되었다.
‘이 말 해도 될까?’
‘이 단어는 괜찮을까?’
‘상대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계산은 결국 내 언어를 늦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늘 한 박자, 아니 여러 박자 늦는다.
주제는 벌써 바뀌었고, 나는 아직 내 차례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다.
그럴 땐 참 민망했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던지는 말인데, 나는 준비를 마치기까지 한참이 걸린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내게 “그거 정말 힘들겠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건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라
몸과 말과 반응이 그렇게 길들여져 버린 상태니까.
말은 때때로 어떤 물건보다 무거울 수 있다.
그 무게를 조심하라고 한 가르침이었겠지만,
그 말은 동시에 내 자유와 창의성, 자발성을 갉아먹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주장을 하고 싶은지,
먹고 싶은 것 하나조차 선택하지 못하고 넘기는
습관화된 자기 소멸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절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통제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까지 이어질 때,
그건 평생을 옥죄는 족쇄가 된다.
지금 내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겪는 그 느린 리듬, 낮은 자신감, 조심스러운 어조는
어쩌면 그 시절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잃지 않는 것.
그게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앞으로의 내가, 더 나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안의 목소리를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전에 나에게 먼저 들려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