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나아졌니?”
“그래도 밖에 나오는 거 보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꽤나 자주 들었던 말이다. 아니, 지금도 듣는 말들이다.
남들 눈엔 그래 보일 수도 있겠지.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모습만 보면,
내가 이제는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나는 한 번도 내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집에서의 내 모습과 바깥에서의 내 모습.
다르잖아?
언제나 늘 현재진행형이다. 좋아질 때도 있었겠지만,
그 이후로는 그냥 조금 더 평온해지기 위해,
내 방식대로 애쓰며 살아가는 중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금전적인 활동이든, 인간관계든—
어떻게 매번 매일 입 다물고, 귀 닫고, 눈 감고 살 수 있겠는가.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에도 말했을 거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지금도 우울해?”
“매일 울거나, 늘 다운돼 있어?”
“매일매일 우울해? 그럼 아무것도 못 하잖아?”
무례한 질문이다. 그리고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질문들이다.
우울증을 겪는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질문은 결례를 범하는 일이란 걸 인지해야 한다.
그 편견 섞인 말 한마디에 나는 조금 더 작아진다.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 아니다.
뇌의 화학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감정을 관장하는 기능이 고장 난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 다쳤다고 예를 들어버려서
우울증은 의지유무, 내가 나약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뉘어버렸다.
하지만 의지가 어떻고 내가 나약하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죽고싶었지만 살고싶었다.
처음이 어렵지 정신건강의학과도 감정이 아프기에 가는 곳이다.
약을 처방받았었고, 지금도 처방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증상이 먼지만큼 작아질 때까지 처방을 받을 거 같다.
물론, 약을 끊고 싶을 때도 많고
피곤에 지쳐 그냥 잠들어 약을 거를 때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복용’도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루틴이 되어 있다.
내가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면, 그건 호전된 게 아니라 그저 괜찮아 보이기 위해 내가 노력한 결과다.
아니. 노력을 넘어서 애를 쓴 결과다. 나도 무던한 사람이고 싶거든.
밖에 나갈 용기를 낸 것도,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움직인 거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그 시선,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겉모습이 멀쩡하다고 해서 모든 게 다 건강한 사람?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이곳만 보아도 겉모습은 너무나 멀쩡함에도 속으로는 곪아서 아픈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때론 너무 무례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화도 내야 하고,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쌓인 잔존 기억, 상처, 습관, 공포—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트라우마로, 우울로, 공황으로, 대인기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남들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힘든 삶을 살았다고.
이런 글들을 쓰면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고생했구나”,
“나도 그랬던 것 같아”라는
속삭임 하나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우울증, PTSD, 그리고 다른 이름의 질환들이 이야기로 풀어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있음에,
고개를 들어 조용히 이야기해 본다.
“괜찮아졌냐고? 아니.
나는 지금도 살아내는 중이다.”
※ 안녕하세요 딥페이지입니다.
이 글이 이번 저의 짧은 에세이 마지막편입니다.
그 다음 글은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