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처음이지만, 자식도 처음이다.

by 딥페이지


나는 사실 SNS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도 조금 재미나게 했던 SNS는 페이스북이 마지막이었고,

인스타그램은 릴스나 짧은 영상으로 도파민을 채우는 정도였다. 꾸준히 하는 건 그나마 블로그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스레드라는 SNS를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내 경험과 겹치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놀라웠다. 사실 놀랍기보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많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특히 내 또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사이에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를 만한 말들을 부모에게 자주 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우리(부모)가 없으면, 이 세상엔 동생이랑 너뿐이야.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여행을 갈 때든 외출이든 다툼이 있고 훈육을 할 때든

어느 시점에서든 부모가 번갈아가며 한 번씩은 꼭 했던 말.

언뜻 들으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성인이 된 후에야 알았다.

진짜 내 부모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혼을 하셨고, 나와 동생은 좁은 단칸방에서 지냈다.

부모가 전부였던 시기에, 보호와 관심 대신 “짐” 같은 말을 들었다는 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벅찼던 일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떤 친구들이 학교생활과 집안 살림을 한다고 하는 것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더 안타까운 건 이런 경험을 한 아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에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은 성인이 된 후 우울증, 공황장애, PTSD 같은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공포와 높은 불안감은 이젠 같이 가는 동반자 느낌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흘려들었어야 할 말들이지만, 아이들은 그럴 힘이 없었다. 아니. 걸러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0에 수렴한다. 그래서 결국엔 혼란만 남는다.


특히 집안의 맏이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첫째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집안의 기둥이라는 말 한마디로,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떠안는다. 하고 싶은 일은 뒷전이 되고,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휘둘리다 소진되어 버린다. 결국 그렇게 나를 잃는 것이다.


나는 부모라면 이런 말을 반드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이든 딸이든, 첫째든 막내든 모두

똑같이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다.

부모가 ‘엄마’, ‘아빠’라는 이름을 처음 얻는 것처럼, 아이도 ‘아들’, ‘딸’이라는 이름을 처음 얻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부모는 조금 더 먼저 살아왔고, 살아온 그 시간만큼 자녀들이 제시하는 문제에 대해

오답을 말할 확률보다 정답을 말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렇기에 서로의 ‘처음’을 혼란과 상처로 남기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한다.


오늘도 수십억 인구 속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 그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남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

내 하나뿐인 아들, 딸. 나의 아이들에게만큼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부모가

곧 하늘이고 세상일 그들에게 상처 대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혹시 당신은 아이에게, 혹은 가족에게 혼란을 주는 말을 하진 않았는가? 그렇다면 후회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언제든 너를 지지하고 너를 사랑하며 네 비빌 언덕이 되어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