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빌 언덕의 부재
학창 시절,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의 나는 그 감정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도 몰랐다.
좁은 단칸방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가만히.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아버지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까지는 그가 유일한 비빌 언덕이라고 믿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요. 다시 일어날 시간을 같이 보내주면 안 될까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름의 용기를 짜내 쓴 문장이었다.
돌아온 답장은 짧고 차가웠다.
“네 나이에 맞는 일을 하는 게 네가 할 일이다.” 지금의 내가 보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 그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단절이었다.
그 한 줄이 나를 더 방황하게 만든 불씨가 되었던 것 같다.
엇나간 적은 없다.
고작 해야 학교를 결석하거나, 집에 아무도 없는 척 숨는 정도였다.
그러다 조금 나아지면 다시 학교에 가고, 또 무너지면 숨어버리고.
그 반복은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계속됐다. 중·고등학생 시절, 내가 어른이라고 믿었던 사람의 부재와
내가 제일 사랑하던 친할머니의 소천은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고등학교는 졸업했다.
철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무거웠던 6년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 비빌 언덕의 부재는 더 선명해졌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점점 더 멀리했고,
나는 그 당시 살던 동네 자체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 사이에 사기도 당했고, 실연도 겪었고, 크고 작은 상처들도 많이 입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그 언덕은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라도, 왜 우리를 데려왔는지 보여주길 바랐다.
그 바람은 내게 너무 컸던 걸까. 기대하다가, 또 실망하고.
그러다 결국은 포기했다.
포기하고 또 포기하다 보니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무뎌지고, 우울과 칩거가 시작된 시점이.
멘토를 자청하던 친한 선생님에게도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너무 힘들어요. 지쳐요. 우울해요.”
낼 수 있는 티를 다 내며 SOS를 보냈다.
돌아온 말은 이랬다.
“어차피 넌 아무것도 안 하는데 뭐가 힘들고 지치니?”
그 한 문장이 스무 살의 나를 무너뜨렸다.
화를 삭이며 집으로 돌아와도, 위로받을 곳은 없었다.
대한민국의 장남, 장녀라는 이름에 얹힌 무게가
그때도 지금도 싫다.
물론 지금은 나를 위한 선택만 한다.
비빌 언덕도, 책임져야 할 가족도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한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움도, 사랑도,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체념 속에 서 있던 그 시간들이
아직도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단 한 번이라도,
그때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을까.